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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10.

by 이글로

"그나저나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해지신 겁니까?"

"음…… 글쎄요. 뭔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실제로 달라진 건 없잖아요? 그래서 여쭤봤어요. 힘이 확 세진다든가, 아니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닐 정도의 점프력이 생긴다든가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아……"

"왜 한숨은 쉬고 그래요?"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니 심히 당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한 제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져서요."

"저번부터 단순하네 무식하네 자꾸 뭐라 하시는데, 따지고 보면 그쪽도 만만치 않거든요?"

"이번엔 단순하다고만 했지 무식하다고는 안 했습니다만."

"아오, 진짜! 그냥 적당히 좀 넘어가주면 어디가 덧나나."


지홍은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할 말은 더 있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을 기세다. 과거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쥐던 힘을 생각했을 때, 따귀 한 방으로 얻게 될 대미지는 분명 만만치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이 되자 지홍은 더 이상의 장난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분을 삭이려 씩씩거리는 휘영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그는 슬그머니 다른 화제를 내밀었다.


"아, 그건 그렇고 혹시 누가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누가 찾아와요? 동료들이야 심심치 않게 종종 오는 편이고, 지금도 오셨네요 여기."

"동료 분들이나 지인들 말고,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인데 갑자기 불쑥 찾아왔다거나 하는 거요. 음, 질문이 좀 이상한가?"

"뭐, 예를 들면 가만히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길을 막고는 자연스럽게 아는 체를 하며 말을 건다든지 하는 그런 거요?"

"……그걸 아직도 담아두고 계셨군요. 전 나름대로 부드러운 방법을 쓴 건데."

"하, 부드럽게 안 하셨으면 제가 멱살 잡혔을지도 모르겠네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죠. 전 그나마 형사였으니 망정이지, 모르는 사람이 날 알고 있는 거 보통 사람한테는 기겁할 일이거든요? 스토커도 아니고…… 아무튼 뭐, 그런 사람이 찾아온 적은 없네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신현우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옳았지만, 그 순간 휘영은 왠지 그 사실을 감추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지홍이라는 사람이나 신현우라는 사람이나, 휘영의 입장에서 보면 본래 낯선 사람들이다. 공통점이라면…… 일단 근원계라는 곳에 관계된 사람들이고, 그들이 먼저 찾아왔다는 점,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 정도.


그렇다면 차이점은……? 글쎄……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건 떠오르지 않는다. 지홍이 현우에 비해 꽤 일찌감치 찾아왔다는 것 정도일까? 그런데도 현재 관계를 보면 극명하게 다르다. 지홍에 대해서는 자신의 편이라고 여겨지는 반면, 현우에 대해서는 중립 혹은 약간 적대에 가까운 느낌이 강하다.


단지 잠깐 먼저 더 알게 됐고, 그 사이에 나눴던 이야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오히려 지홍의 화법이나 행동거지는 휘영의 신경을 긁어놓을 때가 있었고, 인상이 좋았다가도 밉상으로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 언제부터 이 사람을 그토록 신뢰하게 된 걸까? 무엇을 믿고?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일이 또 있어서 가봐야 할 듯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그 인간을 직접 소개해드리는 것보다는 제 선에서 알아보는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 상관없어요. 어떻게든 알아봐 주신다면야 저는 감사하죠."

"좋습니다. 그럼 궁금하신 내용을 한 번 정리해 보죠. 일단, '개개인의 능력 획득에 관련된 규칙이 정해져 있는지'가 핵심이 될 것 같군요. 그 외에 또 다른 의문사항이 있으십니까?"

"제가 쫓고 있는 범인, 그러니까 그 미친 돌연변이 놈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이미 말씀하신 것 외에 추가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는지, 또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같은 거요."

"까다로운 주문이군요. 지금까지 알려드린 것도 겨우겨우 긁어모은 건데. 뭐, 필요하다고 하시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저희 쪽에서도 계속 알아보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말을 마친 지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빈 머그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돌아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아마 퇴원하신 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저기, 지홍 씨."

"네?"

"저…… 근원계라는 곳에서 저는 어떤 존재인가요?"

"……뭐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그런 걸 물으시는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 뭐랄까, 예전에 설명하실 때 제가 딱히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그냥 수많은 케이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셨잖아요."

"정확히는 '백 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구한 운명 같은 건 아니다'라고 했었죠."

"그런데 가만 보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것 같아서요. 어려운 부탁도 최대한 들어주려 하시고."

"난 또 뭐라고……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딱히 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평범한 것도 아닙니다. 신경을 많이 써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의미부여 같은 거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제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게 싫을 뿐이니까.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으시군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지홍은 장난스러운 말투와 함께 한 손으로 자신의 멱살을 잡는 시늉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명함을 꺼내 흔들어 보인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처음 만났을 때 휘영이 멱살을 잡았던 일을 빗대는 모양새다.


"……그걸 지금까지 담아두고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구더러 소심하다는 거예요? 하여간에 진지해지는 꼴을 못 본다니까. 알았으니 그만 갈 길이나 가시죠."






지홍은 병원을 나오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했다. 굳어 있는 표정.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럽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분위기다. 그는 머릿속으로 휘영이 했던 질문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본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분명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면 완전히 깨어난 상태인데…… 그런 것치고는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꽤나 부실한 편이란 말이지. 기억 누적 프로젝트 대상이라면 적어도 한 번의 생에 대한 기억은 통째로 가지고 있다는 건데, 그걸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냐…… 이런 것도 단순히 이상현상이라는 말로 지나쳐도 되는 걸까?"


지홍은 기본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다. 자잘한 부분이라도 확신이 서지 않으면 가급적 명쾌하게 짚고 넘어가려 하는 타입. 때문에 임무 성과는 언제나 높은 편이었고, 그 반대급부로 임무 중 스트레스 지수도 높은 축에 속한다. 그런 식으로 살아온 세월이 꽤 긴 탓에, 정상 궤도에서 상당히 벗어난 듯한 케이스를 담당하고 있는 요즘 거의 모든 나날이 불안의 연속이다.


사실 궁금해하는 부분에 답해주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판단은 전적으로 각 케이스를 근접 담당하는 실무자들에게 달려 있으며, 책임 또한 실무자들이 지도록 규정돼 있다. 잘 모르는 일의 책임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단 하나. 지홍은 조언을 구할 만한 곳을 찾기로 했다.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찜찜한 부분을 남기고 지나치기엔 너무도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


[어, 웬일이냐? 그것도 화상통화네? 내 얼굴 꼴 보기 싫다고 노래 노래를 부르는 놈이.]

"조언이 좀 필요해서요."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너 지금 조언이 필요하다고 한 게 맞냐? 나한테?]

"네, 맞는데요. 제 직속 관리자, 백현 강림팀장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푸하, 푸하하하하!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드디어 네가 나를 이름에 직책까지 정식으로 불러주는구나. 난 계속 '형님'으로만 부르길래 혹시 내 이름 까먹은 게 아닌가 했지. 내 이 날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래,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팀 초엘리트 후배님. 이 형이 무엇을 조언해 주면 되겠나?]

"아, 진짜. 그 변태 같은 수식어랑 오글거리는 말투 좀 어떻게 안 됩니까? 손발이 남아나질 않겠네 정말. 아무튼…… 형님 혹시 예전에 실무 뛰던 시절에 프로젝트 대상자 담당해 본 적 있어요?"

[프로젝트 대상자? 어, 완전 초창기 때 딱 한 번 맡은 적 있었지. 왜, 그거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는 거냐? 네가 맡은 케이스 문제가 참 많은 것 같긴 하더구만.]

"아……? 그러셨습니까……?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만 문제없으면 되는 거 아니냐?' 이건 어디 사는 어느 분이 내뱉은 대사였더라?"

[허허허허허… 거, 살다 보면 실언도 하고 그러는 거지. 왜 과거 발언을 자꾸 들추고 그러냐. 민망하게시리.]

"그러니까 평소에 입 좀 조심하시라 이겁니다. 생각난 대로 막 내뱉지 마시고. 그나저나 이거 원래 이렇게 변수가 많은 겁니까?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은데? 형님 때도 그랬어요?"

[이상현상이라면 나 때도 장난 아니게 심했지. 말도 마라, 나 그때 맡은 케이스 때문에 곤욕 제대로 치렀다. 나이가 마흔이 다 될 때까지 깨어나지조차 않아서 이대로 그냥 돌아가겠거니 생각하고 마음 놓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샥 사라져 버렸지 뭐냐. 정말 난리난리 생난리였지. 어우,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뭐요? 그 유명한 케이스가 형님 담당이었어요? 영이 통째로 사라졌다던?"

[어, 내가 말 안 해줬던가? 하긴, 해줬으면 네가 이제 와서 물어볼 리가 없겠구나. 나 그거 때문에 징계 제대로 먹었었다. 다행히 프로젝트 초창기여서 실무자 책임은 최소한으로 봐주던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워낙 그전에 성적이 좋아서 그런지 근신만 잠깐 하다가 바로 중간 관리자로 발령받았지. 아 참, 이거 근원계에서는 쉬쉬하고 있는 사항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암만 봐도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못 미더워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그 덕분에 지금 그렇게 펀펀 놀면서 일하고 계신다 이거네요?"

[……아? 아…… 그러고 보니 난 아직도 벌을 받고 있는 거구나…… 너 같이 까탈스러운 녀석을 관리해야 하다니. 엉엉, 불천님 제가 잘못했어요. 전 언제쯤 이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나요……]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에이, 그럼 형님한테서는 뭐 얻어갈 수 있는 게 없겠네."

[응?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인마. 너 자꾸 그렇게 선배 무시하고 그러면 언젠가 큰 벌 받는다? 내가 직접 담당은 안 했지만 이래 봬도 중간관리자 노릇 하는 동안 주워들은 정보가 꽤 많다 이거야. 명색이 팀장인데 프로젝트 접근 권한 같은 것도 너보단 높지 않겠냐?]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럼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몇 가지 좀 여쭤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밑져야 본전…… 뭐? 에라이, 못 돼먹은 성깔 하고는.]


지홍은 지금껏 그러려니 하고 넘겨왔던 미심쩍은 부분들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시기를 한참 지난 시점에 갑자기 깨어난 휘영을 자신에게 맡긴 것,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능력만 먼저 발현됐던 것, 어떻게든 기억이 돌아오긴 했는데 그것조차 불완전해 보이는 이유까지. 차근차근 듣던 백현은 입을 딱 벌리며 혀를 내두른다.


[……뭐야, 이 녀석. 왜 특이 케이스만 맡기냐고 징징거리길래 앞으로 먼저 찾아갈 필요는 없다고까지 해줬더니. 무진장 열심히 알아보고 다녔네?]

"자존심이 있지 일단 맡은 일은 제대로 해야 성에 차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되겠지 뭐. 아무튼, 이제 좀 말해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프로젝트 대상자인 거 형님도 몰랐어요?"

[처음엔 몰랐지. 나도 위에서 까라면 까는 입장인데. 왜 그때 있잖아. 너네 가게로 찾아와서 이야기 듣고 갔다고 아침에 전화한 날. 그 직전 즈음에 알았지, 아마. 그래서 그때 바로 얘기해 줬을걸? 기억 누적에 관한 현상은 뭐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프로젝트 대상자니까 알아둬라'라고 이야기하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 이야기해 줬다 쳐도 워낙 머릿속이 복잡하던 때라 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에라이, 이기적인 놈아. 자기는 같은 얘기 반복하는 거 싫어한다는 놈이……]

"이게 다 형님 때문에 생긴 버릇이거든요? 그리고 형님은 일 좀 열심히 하셔야 되니까 같은 얘기 좀 반복하셔도 됩니다."

[그래, 이 못된 놈아. 내가 죄인이지. 그래서 뭐, 어떤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 주면 되는데? 서비스해 주는 셈 치고 이 참에 내가 아는 거 제대로 한 번 풀어주마.]

"우선 프로젝트 대상자들을 관리하는 원칙에 대해서 아는 대로 훑어주시죠. 현재까지 밝혀진 이상현상이랑 대처법 같은 것도 아시면 이야기 좀 해주시고요."

[와~ 이놈 보게? 단 한 방에 밑천까지 긁어먹겠다는 심보구만. 오냐, 이번엔 내가 허술하게 한 부분이 있으니 인심 쓴다.]


지홍은 기억 누적 프로젝트 대상자들에 관한 전체적인 파일을 원했다. 그동안 휘영에게서 나타난 이상현상들은 대개 근본적인 부분과 관련된 것들. 따라서 개별 케이스가 아닌 전체적인 차원에서 큰 그림을 먼저 그려볼 필요가 있었다. 백현은 대순환 관리에 투입된 세 개의 팀 중 하나를 맡고 있는 팀장답게 꽤 체계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근원계 역시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사회. 즉, 그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 시스템과 원칙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를 택하고, 헌법이라는 형식을 빌어 사회의 기본적인 합의사항을 마련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모든 구성원이 동의, 숙지하도록 돼 있고, 이는 대순환의 기억 리셋에서도 예외로 처리된다. 즉, 각각의 영에 기본으로 탑재되는 일종의 영구 보존 데이터와 같다.


하지만 기억 누적 프로젝트는 애초에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실험적 프로젝트. 전생의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덧씌워나갈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배제하지 않겠다는 가정 하에 출발한 것이다.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 즉 영구적으로 보존돼야 정상인 부분에 손상이 갈 경우에 대해서도 가정해 놓은 내용이 있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건 기본적인 부분까지 손상됐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멍청한 질문이라니, 거 자식 말을 해도…… 너 케이스랑 면담할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이 멋대가리 없는 놈아.]

"그건 형님이 신경 쓸 바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무슨 몸과 마음 토탈케어 서비스해 주는 사람도 아닌데. 말 돌리지 말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봐요."

[그래, 분명 가이드에 있는 내용이긴 해. 엄청나게 드물어서 거의 취급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어쨌든 가이드에 있다는 건 대처 방법도 있다는 뜻이겠죠?"


핵심적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발견되면 담당 실무자는 몇 가지 중요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영의 거취. 즉, 근원계로 돌려보낼 것인가 잔류시킬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이지. 어디 보자~ 그쪽 세계 구조에 적당히 빗대서 예를 들어주마. 흠…… 뭐가 좋을까? 그래, 누군가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그곳의 관습과 문화를 배우고 자랐다고 하자. 그 관습과 문화라는 건 대를 이어 계속 전해짐으로써 형성된 것이지. 그 사회의 고유한 속성이랄까?]

"다른 나라로 이주해도 기본적으로 한국이 어떤 나라라는 걸 기억하고 있다, 뭐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까?"

[맞아. 그런데 말이다. 만약 어떤 사고로 인해 이주해오기 전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어떨까? 그 사람은 과연 한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쉽진 않……겠죠?"

[그렇지. 그럼 조금 다르게 질문을 해보자. 그런 케이스가 굳이 한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긴 한 걸까?]

"……"


지홍은 갑자기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억이 소실돼 거의 백지화(白紙化) 된 케이스. 그건 당연히 휘영을 빗댄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올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질문은…… 지홍은 그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가이드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임의로 생을 정지시키고 근원계로 돌려보내도록 돼 있어. 하지만 원칙이라는 건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를 옥죄고 있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원칙을 수정,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지.]

"특수한 상황이라면…… 돌연변이입니까?"

[오냐. 돌연변이는 그 탄생부터 근원계의 질서를 벗어난 존재다. 완전히 우리와 대척점에 있는, 혼돈 그 자체의 것들이지. 만약 어떤 돌연변이가 기억의 대부분을 잃은 영을 우연히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거야 모르죠. 그러니 놈들을 연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이어이, 후배님. 간단하게 생각해. 지금 너도 알고 있는 골칫덩어리 돌연변이 케이스가 있지. 그놈의 능력이 뭐냐?]

"자아…… 이식…… 설마?"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이미 놈이 다른 개체로 돌아다니는 걸 몇 차례 목격한 바 있으니 사실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 그럼 만약에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놈이 존재한다면?]

“형님, 그건 지나친 비약 아닙니까? 이상현상이 좀 심각한 수준이긴 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생각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오케이, 인정. 네가 직접 체크하고 판단했을 테니 정확하겠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기정사실화할 수도 없고. 어쨌거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결론은 이거야. 섣불리 모든 정보를 오픈하지 말고 더 꼼꼼하게 알아보라는 거. 어떤 경로로든 돌연변이가 근원계로 들어오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혹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너나 나나 절대 가벼운 징계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이건 농담 아니다.]

"농담으로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는 주제거든요."

[듣고 보니 너도 참 골치 아프겠다만…… 나도 자유롭진 못하겠구나. 내 모가지까지 너한테 달려 있거든. 건투를 빈다, 후배님. 어이쿠, 회의가 잡혀 있는 걸 깜빡했구만. 그럼 난 이만!]


통화를 마친 지홍은 잠시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들. 지금까지 대체 내가 뭘 들은 거지? 돌연변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휘영의 성격이 좀 드세고 까다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돌연변이와 연결 짓는다는 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두통이 몰려온다. 하여간…… 이 빌어먹을 놈들은 뭐 하나도 도움 되는 법이 없다니까.


"젠장,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렸네."


오만 가지 망상이 떠오른다. 눈을 감고 차분하게 '생각의 속도를 늦춘다'는 암시를 걸어본다. 침착해지자. 냉정해지자. 차근차근, 다음에 고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는 무엇이 있는가. 우선은 휘영이 돌연변이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이 케이스를 맡고 싶지 않아 질지도 모르니까.


"정보가 필요해. 돌연변이에 관한 최대한 많은 정보.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능력 획득 규칙에 관한 건 물어볼 틈도 없었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지."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https://brunch.co.kr/magazine/24jh-nove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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