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은 스크린에 떠오른 자료 화면과 두툼한 서류다발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꽤나 까다로운 고민에 빠져 있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두드린다. 몸이 뻐근해질 때마다 앉은 자세를 몇 차례고 고쳐가며 한참 동안 자료들을 검토하고 있다.
"어디에다 어떤 식으로 숨겨놓은 걸까, 대체. 성질 같아선 확 쳐들어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일이 너무 커지겠지? 확실한 증거를 잡은 다음에 가야 딴소리를 못하지."
해강현을 만나고 돌아온 뒤 불천의 신경은 온통 한 곳에 쏠려 있었다. 사라져 버린 영. 기억 누적 프로젝트의 초창기에 발생했던 이 역대급 돌발 사태는 근원계 전체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줬다. 질서와 규칙을 최우선의 가치로 치는 근원계에서 정해진 궤도를 벗어났다는 것은 심각한 중죄. 그중에서도 시스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 '두 세계 사이의 순환 법칙'을 벗어났다는 건 영의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물론 시스템 차원에서도 큰 일일 수밖에 없다.
당시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해강현은 사건이 공론화되자마자 즉각 총괄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외적으로는 실패에 대한 징계를 받아들인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인을 밝혀내는데 책임을 다하겠다는 그의 뜻을 수용한 조치였다. 이후 해강현은 한동안 개인 연구실에 틀어박혀 모든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실험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를 주기적으로 불천에게 보내왔다.
그동안 해강현이 보내온 모든 연구 결과, 즉 지금 불천이 검토하고 있는 자료들은 모두 '영이 사라졌다'는 대전제 하에서 작성된 것들이다. 당시에도 닳을 정도로 반복해서 살펴봤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자체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기도 했고, 설령 진실이라 해도 '사라진다'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 결국 이 사건은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뒤 미해결로 분류됐다.
이후 해강현은 수면 아래에서 홀로 추적을 계속해 왔다. 그 첫 성과가 이번 불천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셈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겼을 가능성. 해강현 스스로도 십 년 넘게 매진해 온 모든 연구를 출발점부터 뒤엎은 발상. 고작 몇 마디 말로 전해진 가설이었지만, 불천에게는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고,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현실적으로만 따져도 이쪽이 훨씬 그럴듯한데.
한참 동안 이마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골몰해 있던 불천은 뭔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흠. 다른 팀들은 특별한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하고…… 백현 팀장은 다소 골치가 아프겠군요. 참작은 해드리겠지만 그 때문에 다른 부분 관리에 너무 소홀해지지 않도록 신경 좀 써주시길 바랍니다."
"넵, 물론입니다."
"그럼 이번 회의는 이걸로 마치도록 합시다. 팀 별로 요청한 자료는 곧바로 확인해 본 뒤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팀장 회의를 주관하는 염훈이 나가고 나자 딱딱했던 회의실 분위기는 삽시간에 물렁해진다.
"휴우, 숨 막혀. 그나저나 하아…… 백현님 진짜 안 됐다. 하필 그런 복잡한 케이스가 걸리시다니. 팀원 중에 막 개기는 애도 있다면서요. 불쌍해서 어떡해."
"그러게 말입니다. 어, 혹시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도 안 되고 눈에도 안 띄면 불천님한테든 그놈한테든 맞아 죽었나 보다 하시고 제삿밥이나 좀 챙겨주세요."
"이런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발휘하려 하시다니. 그 배짱과 여유만큼은 좀 배우고 싶군요. 아무쪼록 잘 풀리길 기원하겠습니다. 아, 저는 바로 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다음번 회의 때 뵙죠."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봐요."
일직팀장과 월직팀장이 나가고 난 뒤 백현은 자리에 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회의에서 정식으로 보고가 올라갔으니, 이제 그를 비롯해 지홍과 휘영까지 주시 대상이 됐을 터. 공론화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최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은 채 버텨왔지만, 오늘은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의장인 염훈이 먼저 그 주제를 꺼낼 줄이야…… 즉,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돼 버린 셈이다. 일직팀장의 말대로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일이 풀려주기를 바랄 수밖에.
"여기 있었군, 백현. 혼자 뭐 하냐?"
푹 퍼진 자세로 한껏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뜻밖의 방문객이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을 건넨다.
"엑……!? 대왕, 아니 불천님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인마, 내가 내 발 가지고 돌아다니는 게 뭐 어때서? 못 올 데를 온 것도 아니고."
"하…… 하하, 그건 그렇죠. 그나저나 '여기 있었군'이라는 말씀은……"
"응 맞아, 딱 너 잡으러 왔지."
"……"
맞은편 자리에 불천이 앉았다. 백현은 꿀꺽 침을 삼킨다. 멍하니 풀려 있던 표정은 어느새 바짝 긴장한 상태. 당최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최고위층 중 하나인 불천이 일개 팀장인 자신을 직접 찾아왔다? 왜? 어째서? 호출 한 번이면 집무실로 알아서 달려가게 돼 있을 텐데. 백현은 머릿속으로 적당한 이유를 찾아보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찾기엔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가 너무 없다. 그러한 백현의 심리 상태를 눈치챘는지, 불천이 먼저 용건을 꺼내준다.
"긴장 풀어, 짜샤. 때리러 온 거 아니니까. 그냥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집무실로 불러서 묻기에는 좀 껄끄러운 주제라서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여기도 기록 시스템이 돼 있겠군. 다른 곳을 찾아야지. 야, 따라와. 멘탈 힐링 좀 시켜주마."
"네? 아, 네. 네네."
각종 나무와 풀, 덤불 등이 풍성하게 자란 녹지(綠地). 불천이 느긋하게 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곳. 난간 너머 광활한 평지가 보이는 테라스에 자그마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불천과 백현이 마주 앉았다.
"아직도 쫄아 있네. 다들 내가 그렇게 무섭나? 그거나 한 잔 마셔라. 요 아래에서 가꾼 찻잎으로 끓인 거야."
"가, 감사합니다."
백현은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시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차 한 모금을 넘긴다. 불천은 재미있다는 듯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마시면서 들어. 네 생각엔 내가 너를 왜 찾았을 거 같냐?"
"그…… 골칫덩어리 특별케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 아, 그거 네 팀에서 맡고 있었구나? 근데 어쩌냐? 그거 아닌데."
"네? 그, 그럼……"
불천은 잠시 뜸을 들였다. 멀리 풍경을 한 번 내다보고 차 한 모금을 마신다. 불천은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며 뭉뚱그리기엔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잔뜩 주눅이 든 백현이 그걸 알아채기엔 역부족이다. 이윽고 불천은 결심을 굳힌다. 그래, 이 참에 확실하게 짚어두자.
"프로젝트 초창기에 그 사라져 버린 영에 대한 거 말인데."
"으악, 불천님. 그, 그게요. 제가 막 떠벌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갑자기 펄쩍 뛰어올라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백현. 그 바람에 오히려 불천 쪽이 살짝 당황한다. 이 자식 이거 왜 이러지? 자꾸 쭈뼛거렸다가 쩔쩔매다가 혼자 헛다리 짚고 발광하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짓을 하긴 했나 본데. 떠벌린다는 표현을 들으니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긴 한다.
"됐고, 일단 좀 일어나서 앉아."
"……봐주시는 겁니까?"
"아, 뭐라는 거야 대체. 너 이 자식 이제 보니 어디 말단한테 그거 얘기하고 다녔냐? 하여간에 말도 지지리 안 들어요. 콱 이걸 그냥…… 암튼 그거 추궁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셀프 고해성사는 나중에 따로 하고 일단 일어나 앉아봐."
"네네."
백현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구겨진 곳을 가다듬는 동안, 불천은 농장 쪽에 시선을 둔 채 차 몇 모금을 더 마셨다.
"내가 말이야. 그때 결재했던 기록들을 싹 다시 살펴보고 있는 중이거든. 근데 보니까 그때 그 케이스 실무 담당자가 너로 돼 있더라?"
"네, 그랬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서류상에 기록 안 된 거 넌 알고 있을 거 아냐.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사라졌다고 보기엔 이상하잖아? 뭔가 계기가 있었겠지. 네가 기억하고 있는 거, 다 말해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뭐든."
"……만족스러운 대답을 드리면 딴 데 말하고 다닌 거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어쭈? 이 놈이 날 상대로 흥정을 하려 드네? 좋아, 기분이다. 내가 요즘 이거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거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건 면책해 주마."
"음, 쉬쉬하고 있느라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딱 하나 있었죠. 돌연변이에 관련된 문제였으니까요."
돌연변이라는 단어에 불천의 미간이 꿈틀 한다. 백현은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흐아암~ 오늘도 별일 없이 흘러가려나……"
백현은 팔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정말 심심해도 너무나 심심한 일상의 연속이다.
"에이, 신규 프로젝트라고 해서 신나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심심해서 견딜 수가 있나. 이럴 거면 좀 바빠도 예전에 하던 게 훨씬 낫잖아?"
대순환 관리 부서에 배치된 이후 백현은 줄곧 승승장구해 왔다.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아 일 처리가 확실했고, 넉살 좋고 붙임성도 좋은 성격이라 상급자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 게다가 일반 케이스의 경우 한 번에 혼자서 수십 개를 관리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기억 누적 프로젝트가 처음 시도되던 즈음, 관리를 담당할 인선(人選) 과정에서 백현은 최우선적으로 호명됐다. 그동안의 임무 성적을 봤을 때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마침 백현 자신도 기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본래대로라면 한 번에 여러 케이스를 커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실력. 하지만 프로젝트의 중요도 상 예외 없이 단 하나씩의 케이스만 전담하도록 배치됐다. 평균적으로 열 개 이상의 케이스를 한꺼번에 처리하던 백현에게는 다소 맥이 빠질 수도 있는 조치였다.
"하긴…… 이쪽도 제대로 깨어나기만 했다면 좀 스펙터클한 케이스가 됐을지도 모르겠군. 어쨌거나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는 정도는 괜찮겠지?"
백현이 지금의 케이스를 맡은 지도 벌써 30년 가까이 된 시점. 정석대로라면 최소 두 번의 기회가 있었건만, 좀처럼 깨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가 나서서 처리해야 하는 일도 현저히 줄었다. 거의 대부분은 일정 거리 안에서 관찰하다가 정기적으로 동향 보고만 작성해서 올리면 될 뿐.
일반적으로 근원계에서 부여한 영은 육체와 정신의 성장 주기에 맞춰 각성 기회를 가진다. 이 시기를 놓치고 나이가 들게 되면 근원계의 자아가 깨어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이미 이쪽 세계의 자아가 몸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데다가, 경험과 깨달음이 더 쌓일수록 이쪽 세계의 자아는 더 강해지게 마련이니까.
아무리 전생의 기억과 깨달음을 간직한 영이라 해도 애당초 깨어나지 못하면 일반적인 영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두 번째 시기를 놓친 것도 어느새 10여 년 전. 즉, 이제 백현의 입장에서는 담당한 케이스가 이대로 멀쩡히 생을 마친 뒤 다시 근원계로 돌아가기까지 지키는 일만 남은 셈이다.
꽤 오랫동안 주위를 돌며 지켜본 결과 생활패턴도 훤히 꿰고 있었고, 얼마 전 결혼을 하며 남편도 생겼다. 이쯤 되면 굳이 24시간 가시거리 안에 항상 둬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백현의 본능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멀리 놀러 갔다 오기엔 영 찜찜하고…… 생각 끝에 그는 인근에서 활동 중인 동기를 만나 잠시 일탈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여, 백현. 여긴 어쩐 일이냐?"
"워낙 좀이 쑤셔서 말이지. 뭐 도와줄 일 같은 거 없을까? 내가 맡은 케이스는 일이 전혀 없어서 심심해."
"일이 없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쉬면 되는 거지 굳이 일을 찾아다니는 건 무슨 심보냐? 너 혹시 고통을 즐기는 타입?"
"이건 무슨 도와주겠다는 데도 막말이야? 없으면 관둬라, 인마."
"초 엘리트 요원께서 도와주신다는데 나야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근데 마침 딱히 일거리가 없네. 이런 아쉬울 데가…… 마침 나도 좀 심심한데 그냥 여기서 같이 수다나 떨다 가라."
"뭐, 그것도 좋지."
백현이 본래 위치로 돌아온 시각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뒤였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간만의 자유라 그런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아버렸다. 게다가 공식적인 허가 없이 한 짓(?)이라 꽤 스릴도 있었고.
"별일 없을 것 같아서 다녀오긴 했는데 어째 불안하단 말이야. 꼭 이런 날 뭔가 일이 터지기 쉬운데…… 어디 보자~ 내 님은 어디에 계시려나~"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후 8시 30분. 평소 패턴대로라면 백현이 맡은 케이스는 지금쯤 일을 마치고 귀가해 있을 시간이다. 잘 들어갔는지 확인만 하면 오늘도 무사히 끝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곧장 집 쪽으로 향하던 중, 그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늘 다니던 길목에서 상당히 어긋나 있는 방향. 그리고 무척 익숙한 기운.
"하아…… 어째서 불안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옅게 남아있는 흔적을 좇아가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 눈에 띈다. 척 봐도 CCTV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어두컴컴한 장소였지만, 백현의 시각을 피할 수는 없다.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 보이는 두 개의 실루엣. 하나는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뭔가를 하려는 듯, 하고 있는 듯 어정쩡한 모습이다. 다만, 모로 봐도 절대 좋은 의도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익숙한 기운 사이사이에 섞여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기운. 기분이 확 나빠진다.
"뭐야 이 재수 없는 기운은. 돌연변이인가? 가뜩이나 심심했는데 마침 잘 걸렸다. 야, 인마! 너!"
"……!!"
"그래, 너 말이야. 너 지금 얼마나 중요한 분을 건드리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좋은 말로 할 때 하던 짓 관두고 이리 튀어와라."
상대는 백현 쪽을 돌아봤지만 대답은 없다. 하던 행동을 멈추긴 했지만 딱히 일어서거나 다가오려는 제스처는 취하지 않는다. 슬그머니 짜증이 치민다. 화려한 임무 성과를 바탕으로 쌓아온 나름대로의 프라이드가 웬 수상쩍은 놈팽이 덕분에 한 순간에 금이 갔다. 그래, 이런 놈들한테는 결국 실력 행사가 필요한 법이지.
"감히 내 말을 집어 드셨다 이거지? 오냐, 너 오늘 좀 많이 맞을 각오 해라."
살짝 힘을 끌어올린 채 성큼성큼 다가간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자그맣게 패인 흔적이 남는다. 아마 보통 인간이라면 그 모습만으로도 얼어붙을 정도로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다.
풀썩-
끌어올린 힘을 팔과 주먹으로 옮기며 다가설 때 즈음, 멍하니 서있던 상대가 비딱한 방향으로 픽 쓰러졌다.
"어? 뭐야, 이 자식. 아직 때리지도 않았는데? 얌마, 정신 차려. 이렇게 쓰러지면 어떡해? 맥 빠지게."
쪼그리고 앉아 쓰러진 놈의 뺨을 툭툭 두들겨본다. 두 볼에 붉은 손자국이 날 정도로 몇 대 쳤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기절한 듯하다.
"에이, 귀찮게……"
백현은 전화를 꺼내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취객이 쓰러져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댄 뒤, 곁에 까무러쳐 있는 여인을 둘러업고는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경찰 양반들한테 거짓말 한 건 미안하지만…… 뭐 어쨌거나 내가 때린 건 아니니까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그나저나 이상하단 말이야. 멀리서 봤을 때는 분명 돌연변이 같았는데…… 방금 전에는 아무런 기운도 안 느껴졌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때 그 사건 외에는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는 거야? 단 하나도?"
"네. 그것뿐이었죠. 그 사건도 혹시 제가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확인해 봤는데 특별히 이상한 기운은 못 느꼈습니다. 봉인된 영도 멀쩡해 보였고요. 그래서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경위보고만 올렸죠."
"흠…… 정말 그랬을까? 내가 알기론 너, 감지하는 계통 능력은 그다지 신통치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 정도 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왜 발끈하고 그래? 찔리냐?"
"찌, 찔린다기보다는…… 별 도움이 안 됐다고 생각하시면 아까 말씀하신 거 번복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소심하기는. 그깟 거 그냥 한 번쯤 눈감아줄 수도 있다. 어차피 이야기도 잘 들었으니까. 대신, 다음에 또 걸리면 진짜 죽는다. 가서 네가 얘기했다는 그 말단 입단속이나 한 번 더 시켜둬."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놈 입을 꿰매버려서라도 단속시키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이만 가봐라."
백현이 자리를 뜨고 나자 불천은 수하를 시켜 차 한 잔을 더 내오게 했다. 백현의 이야기를 통해 공식 서류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퍼즐조각 몇 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 돌연변이의 습격에서 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
그가 기억하는 한, 백현은 물리적 전투능력은 발군이지만 세밀한 영적 기운을 감지하는 데는 다소 부족한 타입. 그가 눈치채지 못한 안배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연결돼 있다면…… 가설이 딱딱 맞아떨어지자 불천은 심경이 복잡해짐을 느낀다. 문제 하나를 해결한 듯했지만 따지고 보면 더 큰 문제로의 연결고리를 맞춘 것뿐이니까.
"제길. 쉬운 게 없구만."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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