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뜨린 건 없어요?"
"뭐 빠뜨리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애초에 가져다 놓은 것도 별로 없는데."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준비 다 됐으면 가시죠."
"그래. 아~ 드디어 탈출이다.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
오진우 형사는 큼직한 가방 하나를 들고 앞장서 병실 문을 나선다. 따라나가려던 휘영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느낌. 널찍한 1인용 병실이어서 그런지, 그 안에서도 자주 쓰던 공간이 있고 거의 쓰지 않던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긴, 애초에 이런 넓은 병실에서 마음껏 뒹굴 수 있었던 것부터가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입원 기간 내내 특히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던 창가에 시선이 간다. 때 아니게 하늘 구경에 푹 빠진 탓에, 좀 춥다 싶은 날이면 하루의 대부분을 창가에 앉아 보냈었다. 덕분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창가만큼은 휘영에게 꽤 정든 공간이 돼 버렸다.
"은 경위님? 안 오세요?"
"어? 어어, 아냐, 지금 가."
휘영의 집 대문 앞. 진우는 들고 온 가방을 건넸다. 혼자 가겠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고집불통이다. 팀장님 지시라는 둥,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병원에 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둥, 핑계를 늘어놓더니 결국 택시를 잡아 타고 집 앞까지 함께 왔다.
"안 와도 된다니까 굳이 여기까지 오고 그래."
"팀장님 지시도 있었고 그냥 이게 마음이 편해서요. 무엇보다 혼자 가시게 두자니 어째 영 불안하기도 하고."
"흐음, 오 형사. 지금 그 말 왠지 자존심 상한다?"
"아, 그,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역시, 나 챙겨주는 건 우리 팀원들 밖에 없네. 아무튼 고마워. 내일 출근해서 보자."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데, 진우가 다시 휘영을 부른다.
"아, 맞다. 은 경위님."
"응?"
"그…… 그……"
"뭐야? 뭔데 말을 더듬고 그래?"
"막 퇴원하셨는데 이런 말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잡은 그 범인 말인데요."
"……응. 그놈이 왜?"
"음, 뭐랄까…… 지금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데…… 은 경위님이 한 번 가보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내가? 왜, 그놈이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대?"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할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최 형사님이랑 저한테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요.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진단받기도 했고."
"뭐야, 그게. 기억이 나건 안 나건 어차피 수배 걸려있던 놈이잖아? 사건 해결이랑은 별 상관없지 않아?"
"그렇긴 한데……"
"별다른 이유도 없는데 쓸데없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네. 뭐, 원래 혐의랑 무관하게 다른 뭔가가 있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좀 더 생각해 보고 필요하다 싶으면 이야기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도 말해주고. 어쨌든 나도 일단 생각은 해볼게. 이제 됐지? 나 들어간다."
"네, 쉬세요."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 꾀죄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 여기저기에는 낙엽과 흙먼지가 굴러다니고, 길고양이들이 신나게 드나들었는지 곳곳에 음식물 찌꺼기도 떨어져 있다. 마당이 딸린 널찍한 집을 한동안 비워뒀더니 치울 것들이 태산이다. 아마 방 안 꼬락서니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문을 꼭 닫아놨으니 이보다 심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날씨가 꽤 추웠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 휘영은 방에서 두툼한 옷을 꺼내 껴입고 마스크를 찾아 썼다. 대빗자루를 꺼내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추위도 좀 덜하고, 먼지가 휘날리지도 않는다. 고양이들이 떨어뜨려 놓은 음식물 찌꺼기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 빗자루만으로도 쉽게 쓸린다. 한참 묵묵히 비질을 하다 보니 왠지 진우가 했던 말이 자꾸 밟혔다.
"흐음……"
일단 생각은 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말했던 대로 그날에 대한 기억은 체포한 범인의 혐의를 추궁하는 일과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번 사건의 처리는 최재한 형사가 주로 맡아 진행하고 있었으니 구태여 휘영이 참견할 필요도 없어 보였고.
또 무엇보다도, 그 당시 더없이 비참했을 자신의 몰골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수모를 안겨준 상대를 일부러 찾아가 만나고픈 마음은 더더욱 없다. 붉은 아지랑이에 온 신경이 쏠린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고는 해도, 마주하게 되면 그때의 비참했던 기분이 새삼 떠오를 것만 같아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키지 않는다'는 감정이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다. 마당 청소를 마칠 즈음에는 '한 번 가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니, 방 청소까지 끝내고 침대에 드러눕자 '한 번쯤 만나볼 필요가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확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 그래, 확실히 날 알고 있는 말투였지. 오랜만이라고, 날 찾아다녔다고 했었어. 하지만 난 그놈을 모르는데……? 게다가 먹어 치운다니……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병원에 있을 때는 사건 당시의 충격 때문인지 기억이 군데군데 끊어진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몇 개의 조각들만 가지고 애써 그 순간을, 그것도 너무나 두려웠던 순간을 재구성하는 일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그냥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좀 괜찮아지면 자연스레 떠오르겠거니 싶어 미루어두기로 한 것.
그런데 마음이 편해진 지금 차근차근 짚어 보니, 그때 생각나지 않았던 부분들도 하나둘씩 떠오르는 듯하다. 특히, 골목 구석까지 몰렸을 때 놈이 지껄이던 의미불명의 말들은 거의 온전하다 싶을 정도로 분명하게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꽤 있단 말이지…… 그 알 수 없는 이야기도 그렇고, 또 신현우라는 인간이 그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듯했었어. 그리고 정작 그 말을 한 놈은 아예 기억이 안 난다? 그럼 내 얼굴도 못 알아보려나? 그때는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었는데. 흠…… 만약 그렇다면…… 아무래도 한 번쯤 가보는 편이 좋겠네. 내일 팀장님께 말씀드려봐야지."
구태여 가볼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일은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꼭 해야 할 일이 돼 있었다. 수배 혐의와는 분명 무관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짧은 시간에 생각이 정반대로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언뜻 들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사고방식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휘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버렸다. 어차피 최근 들어 그보다 괴이한 일들을 엄청나게 겪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봐 너희들…… 뭐 하자는 거야, 이건? 줄줄이 돌아가면서 날 조롱하기라도 하는 건가? 대한민국 형사들 할 일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나 봐?"
면회실에 들어올 때부터 인상을 쓰던 사내는 투명한 벽 너머 자리에 앉자마자 공격적인 투로 으르렁댄다. 휘영의 눈으로 봤을 때, 여전히 그의 주위에는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눈에 띌 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지고 손에 땀이 배는 정도.
"면회 신청자의 신원은 미리 말해주라고 부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음에 안 들면 안 나오면 됐잖아? 왜 굳이 나와서 첫인사를 그 따위로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 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을 텐데."
"하! 그럼 뭐, 나 잡아넣은 형사 나리한테 어서 오시라고 허리라도 숙여야 했나? 꼬투리 잡는 것을 보니 나랑 입씨름이라도 하러 오셨나 본데, 나야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단 잠깐이라도 빛 보는 게 나으니 응한 것뿐이야."
"그렇게 밝은 곳이 좋으면 진작에 자수하지 그랬어? 그럼 좀 더 자주 면회실에 앉을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 알아? 감형 사유라도 됐을지. 하도 죄질이 더러워서 가능성은 희박했겠지만."
"……거 자꾸 툭툭 쏘아대는 게 참 꼴불견이군. 그나저나 아까부터 왜 계속 반말이야? 나이도 한참 어려 보이는 년이."
"얼씨구? 죄짓고 그 안에 처박혀 있는 주제에 쌀밥 타령에 성 비하 발언까지 하신다? 너 바보냐?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나이대접받고 싶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게 행동했어야지, 어디서 꼴값을 떨어. 웃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사내의 기세가 살짝 수그러든다. 외모로 보나 체구로 보나 겉으로는 만만해 보이는 모습. 도망 다니던 시절 하던 대로 일단 기선을 제압하려 들었지만, 상대는 보기보다 만만치 않았다. 휘영은 놈의 주위에 풀풀 날아다니는 진홍색의 기운을 몇 번 힐끗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시간 아까우니까 헛소리 늘어놓을 생각 하지 말고 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방금 몇 마디 섞어봤으니 알겠지만 내 성질머리가 그리 온순한 편은 아니거든."
"……"
"우선 너, 나 알아?"
"……뭐? 이게 미쳤나.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나 잡아 처넣을 땐 언제고 모르는 사람 코스프레야? 누구 약 올리냐?"
"이런 씨, 말귀 못 알아먹는 척할래? 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 거잖아. 그리고 너 잡아 처넣은 건 나 아니거든?"
"그게 그거지. 별 걸 다 갖고…… 아무튼 몰라. 뇌에 바람 들어갔냐? 내가 경찰하고 친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척 봐도 짬밥 얼마 안 돼 보이……"
삐딱하게 대꾸하던 사내는 짜증스러운 휘영의 태도에 살짝 고분고분해진다. 휘영의 모습을 위아래로 몇 번 훑으며 대답하던 그는 갑자기 말 끝을 흐린다. 그러더니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을 크게 뜨고 휘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그대로 뚝 멈췄다. 마치 동영상의 정지화면처럼.
충격받은 척 말문 닫기. 몇 번 경험한 적이 있는 패턴이다. 연기력은…… 꽤나 봐줄 만하다. 이런 경우 시선을 어느 한 곳으로 고정하긴 하는데, 대개 형사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놈의 시선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휘영 자신에게 정확히 향해 있다. 어라? 이건 좀 의외인데……
"뭐야? 쓸데없는 연기하지 마라. 시간 벌어서 적당히 둘러댈 생각도 관두는 게 좋아. 다른 형사들은 재판이 진행되기 전까지 널 용의자 신분으로 대해줄지 모르겠지만……"
"……생각났어."
"뭐?"
"너…… 거기 있었어, 그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그때. 내가 갑자기 도망갔을 때. 말해줬어. 그 차 안에 네가 있다고."
"……"
사내의 얼굴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이거…… 그래. 공포다. 무서워하고 있어. 하지만 대체 뭘……? 한 단어씩 또박또박 뱉어내면서 떨림은 점점 커진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휘영은 힐끔 교도관 쪽을 바라봤다. 다행히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그들 입장에서는 면회 중에 이런 이상증상을 보이는 게 반가울 리 없을 테니까.
"계속해봐."
"말했어. 네가 날 보고 있다고. 그러니까 일단 도망가라고. 지금, 바로, 알려주는 방향으로 온 힘을 다해 뛰라고. 그렇게 말했어."
"그게 누군데? 거긴 너밖에 없었잖아."
"……몰라."
"이런 씨…… 야, 너 지금 장난해?"
휘영은 주먹으로 벽을 슬쩍 후려쳤다. 통으로 된 유리가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뒤쪽에 있던 교도관이 고개를 들더니 착 가라앉은 눈초리로 휘영 쪽을 바라본다. 주의하라는 의미. 이상하네, 그렇게 세게 친 것 같진 않은데.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놈을 응시해 봤지만,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뭘까? 무엇이 놈을 이토록 잔뜩 겁에 질리게 만든 걸까? 이건 마치 자신이 붉은 아지랑이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다.
"진짜 몰라! 모른다고!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라고 했어. 그래서 도망쳤어. 그 동네로. 그다음부터는…… 몰라. 기억이 안 나. 정신 차려보니 머리가 엄청 아팠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어. 진짜야. 믿어줘."
"……"
급기야 사내는 부들부들 떨며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교도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사내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을 옮긴다.
갑자기 확 돌변한 태도. 대체 왜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그걸 알기만 하면 뭔가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예감. 휘영의 눈에 보이는 짙은 빨간색 아지랑이는 분명 이 자 스스로 누군가를 해쳤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 능력이 좀 더 가다듬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살의나 적대감을 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이건 자신이 쫓고 있는 범인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이 사내 자체가 연쇄 강력범죄로 인해 수배돼 있던 상태니까.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좀 더 대화를 이끌어가 보는 것.
"그래서 뭐야. 어찌 됐건 날 알고 있었다는 거야, 뭐야?"
"몰라, 모르겠어. 그냥 네가 거기 있다고, 도망가라고 그랬다고.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잡히지 않으려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아……"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추궁해 봐야 의미가 없을 듯싶다. 경찰서 취조실이었다면 뭔가 더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치소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 때마침 정해진 면회 시간도 다 끝나간다. 휘영은 교도관을 손짓으로 부른 뒤 면회를 끝내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교도관은 시계와 죄수의 상태를 번갈아 한 번씩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야기하느라 수고했다.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교도관이 사내를 일으켜 데리고 나간다. 휘영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다가 면회실을 나섰다.
구치소를 나서자 추운 날씨에 딱 어울릴 정도의 적당한 햇살이 내리쬔다. 찬바람을 맞으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던 말들이 차분히 정리되는 듯도 하다. 확실히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한과 진우에게 전해 들은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좀 더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것들을 확보했으니까.
"그러니까, 처음엔 그 동네까지 도망간 이후로는 전혀 기억을 못 한다고만 들었었지. 그런데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갑자기 이야기를 더 풀어놨어.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내 얼굴이랑 관련해서 누가 최면이라도 걸어놨다는 거야, 뭐야. 휴우…… 어쨌든 조각 몇 개를 더 얻긴 한 것 같네. 이게 정말 진짜배기 조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리하자면 재한이 휘영의 머리를 붙잡고 있어야 했던, 다소 우스꽝스러운 순간부터 놈은 자신들의 잠복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좀 더 거리를 좁혀왔고, 스스로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말을 듣고 도망갔다는 것. 그 당시 재한은 범죄자의 날 선 촉 때문이라고 진단했지만, 조금 전 들었던 말로 미루어봤을 때는 누군가의 조종을 받았다는 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아 이식이 가능한 돌연변이…… 그거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긴 하는데…… 문제는 그 녀석이 어떤 식으로 내가 있는 걸 알아챘냐는 거지. 나와 같은 계통의 능력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게 되면 벌써 세 가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얘긴데, 그럼 대체 이건 얼마나 거물이라는 거야?"
진범이 자아 이식을 통해 저 사내를 조종한 거라고 전제한다면, 이 만남으로부터 다음 단계로 나아갈 단서는 더 이상 없다. 다른 날을 잡아 다시 면회를 신청하면 더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홍이 가져올 수도 있는 정보를 기다려야 할까? 기다리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대답을 곱씹어봤을 때, 이쪽도 확실하게 믿을 만한 카드는 못 된다. 그렇다면……
'말씀드렸다시피, 대상에 관한 프로필을 건네드릴 테니 놈을 최우선으로 체포하겠다는 것에 동의해 주시면 됩니다.'
신현우가 했던 제안이 떠오른다. 솔직히, 별로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다. 정확한 신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신원조회 같은 걸로 찾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만약 지홍이 찾아왔을 때 물어봤던 '낯선 사람'이 그를 가리키는 거라면…… 그건 근원계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세력이 나눠져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정황상 여기까지는 그럴듯하다. 근원계 내의 세력 구도에 관한 내용이 휘영의 기억 안에 전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기억이 뭔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니 당장 문제 삼을 만한 것은 없다.
그 이후부터는 심증이다. 현재로서는 휘영 스스로 뭔가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무래도 현우가 건네주겠다 말했던 범인 관련 프로필. 그 안에 과연 그녀가 원하는 모든 내용이 들어 있을까? 그것이 있다면 놈을 확실히 추적해 잡을 수 있을까?
확신할 만한 근거라고는 '프로필을 넘길 테니 체포해 달라'는 현우의 말뿐. 그것은 곧 그 프로필이 놈을 찾아내 체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보탬이 될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게다가…… 이걸 받아들인다면 그 뒤에 이어졌던 '미친 제안'도 함께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조건.
'체포 과정에서 실수를 가장해 놈을 죽여주세요.'
급히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린다. 머릿속에 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든다. 이건 아니다. 아무리 절박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할머니도 이렇게까지 하며 자신을 위해주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한숨을 내쉬는 것뿐.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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