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 Origin에 다녀온 이후, 휘영의 삶은 확실히 달라졌다. 경찰로서의 생활패턴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주객(主客)이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스스로 혼란스러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팀에도 악영향이 될 것이라 판단한 휘영은, 최대한 빠른시간 안에 개인 문제를 집중해 해결하기로 마음 먹었다. 정영태 팀장 역시 특별한 언질 없이 그걸 묵인해줬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다행스럽게도, 붉은 아지랑이를 볼 때마다 찾아오던 공포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다소 짙은 기운이 보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곤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심적인 여유를 되찾자, 휘영은 다시 틈나는 대로 지홍에게 들었던 이질적인 이야기를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폭발 사고…… 돌연변이…… 비상식의 영역……"
대형 참사였음에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폭발 사고. 지홍은 그것을 '발화나 폭발 계통의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의 소행일 거라고 짚었다. 기폭 장치나 인화 물질 없이도 광범위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그 중에서도 꽤 상위 클래스의 능력이라는 것.
'이 세계에서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법칙들이 그들에게도 통용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말이었다. 인간이 전혀 겪어보지 않은 무언가를 예측하고자 할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식'을 따르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방식부터 짚어보는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로 그러한 문제 해결 방법 또한 상식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경찰 수사 역시 마찬가지다.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입장에서 사건을 풀어내고자 한다면, 지극히 상식적인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나의 실마리가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지는 데 있어 '보편적인 생각'이 기여하는 바는 크다. 생각보다 훨씬. 하지만, 만약 그것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어떤 것이 단서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조차 상식의 영역 밖에서는 짙은 안개 속에 놓여버리고 만다.
"애초에 우리 팀에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건가……"
이 세계가 아닌 저쪽 세계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세계의 상식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오직 그것만으로도 휘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 사건에 손을 댈 수조차 없게 된다.
근원계. 지홍의 설명에서 빈번하게 등장한 이른바 '저쪽 세계'의 이름. 사후세계나 저승, 피안(彼岸), 천국, 지옥 등 종교라든가 개인 신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곤 하지만, 근본적으로 모두 같은 곳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표현이 익숙하고 낯설고의 문제를 떠나, 딱히 종교가 없는 휘영에게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자기 자신의 몸은 물론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그들 모두의 자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 같은 건 저쪽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가?
'일단 제 쪽에서 알아보던 내용만 알려드리자면, 이번 사건의 범인은 폭발 능력과 더불어 스스로의 자아를 이식하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자면, 음……빙의(憑依) 정도가 되겠네요. 현재로서는 누군가에게 빙의한 다음, 그 사람의 몸 자체를 폭발시키는 방식을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만약 지홍의 가설이 옳다면, 현장에서 폭발물로 추정할 수 있는 성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육체조직이 폭발했을 때 살상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이미 전제부터가 비현실적이기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뼈나 치아 정도가 비산(飛散)한다면 충분히 살상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자아 이식이 가능한 자라면 범인이라 해도 알아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잖아요? 생존한 목격자가 있다고 해도 안 될 테고.'
'바로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이걸 풀어낼 수 있는 능력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음…… 기분 나쁘게 듣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근원계 입장에서 이 사건은…… 돌연변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 능력을 가진 이를 투입해 해결해야 할 만큼 시급하거나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뜻이죠.'
'……'
솔직히 그때는 울컥했던 것이 사실이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돌아가시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은 휘영에게 있어 세상 그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 하지만 그녀 자신의 입장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홍의 설명대로 근원계라는 세계가 그토록 거대한 곳이라면, 그만큼 해결해야 할 문제도 차고 넘칠 것이고, 그 중에는 이보다 심각한 것도 없으리란 보장이 없을 테니까.
"그래, 결국 능력이 문제란 말이지. 능력이라…… 능력……어? 가만?"
그 날의 대화를 차근차근 되짚어 보던 휘영은 문득 최근 자신에게 발현됐다던 능력을 떠올렸다. 시각 계열의 능력, 범죄 가능성, 적대감 또는 살기. 몇 가지 단어를 건너뛰자 점점 정답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방이 막힌 미궁 안에서 자그마한 틈을 발견한 느낌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확인을 해봐야겠어."
당시 대화에서는 없었던 변수. 그 하나를 끼워넣은 것만으로 논리 전개는 확 달라진다. 의문형의 결론. 그렇다면 곧바로 확인해야 한다. 순간의 망설임이 일을 완전히 그르칠 수도 있음을 그 동안 숱하게 겪어본 휘영이다. 형사로서 쌓아온 습관대로 그녀는 곧장 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 또 왜요?]
"대화 예절만 꽝인 줄 알았더니……무슨 전화 받는 게 그래요?"
[엇? 아, 은 경위님이시군요. 미안합니다. 조금전까지 꽤 귀찮은 인간과 입씨름을 하다가 끊긴 참이어서요. 그 인간이 다시 전화한 건 줄 알았지 뭡니까.]
"어련하시겠어요."
[그런데…… 어쩐 일이시죠? 당장 급한 의문은 얼마 전 카페에서 만났던 날 다 해결해드렸다고 생각하는데. 또 무슨 문제라도?]
"그때 제가 바에 찾아갔던 날 해주셨던 이야기 말인데요. 근원계 능력자 어쩌구 하던."
[음? 그 날 워낙 많은 이야기를 해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폭발 사건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 어쩌구 이야기하시던 거."
[아, 네. 그거요. ……어라? 가만,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은 경위님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던 상태였군요. 그 능력이라면……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무래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신 것 같네요."
[제가 놓친 부분을 잡아내시다니. 많이 발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남는군요.]
"뭔데요? 어려운 건가요?"
[네, 쉽진 않을 것 같네요. 먼저 한 가지는 은 경위님이 그때 직접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특정성. 용의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놈이 은 경위님이 찾는 그 녀석인지는 확정할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자아 이식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누구도 놈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
휘영은 적대감이나 살기를 띤 사람, 정확히는 그런 종류의 의도를 가진 사람들을 감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었을 때, 경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즉, 일단 마주치기만 한다면 잡아야 할 대상을 찾아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의 짙은 살기를 뿜는 존재가 여럿이 있다면 추적은 시작부터 난항에 빠진다. 가까운 예로 최근 잠복근무를 하다가 잡았던 성범죄 현행범만 해도 꽤 짙은 핏빛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 수배 중인 연쇄살인 용의자들만 해도 비슷한 수준의 아지랑이를 피워 올릴 거라 추정할 수 있다. 즉, 범인을 찾아도 ‘그 놈이 그 놈인지’ 구별하기는 힘들다는 의미.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출발하는 수사방식으로는 결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별 수 없죠. 지금으로서는 수배 걸려 있는 쪽부터 닥치는 대로 잡아넣는 수밖에. 어차피 그 정도로 짙은 기운을 내뿜는 녀석들이라면 언젠가는 잡아야 할 놈들이 대부분일 테니까요."
[범인이 꼭 수배자 리스트에 있으라는 법은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군요. 뭐, 단순무식하긴 하지만 확실히 그게 최선인 것 같네요.]
"단순무식이라니, 진짜 말을 해도…… 그건 그렇고, 문제가 두 가지라면서요. 다른 하나는 뭔데요?"
[간단합니다. 은 경위님의 그 공포심이죠. 아직 해결하지 못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확실히 그 부분은 아직 해결책이 없다. 처음보다 증상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좀 짙다 싶은 아지랑이를 볼 때면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곤 하는 휘영이다. 대량 살상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녀석이라면 그 아지랑이의 색깔이나 농도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수준일텐데……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설령 방법을 찾는다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확실치 않죠. 당장은 심리상담이나 명상 같은 걸로 무의식의 기억들을 훑어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깡으로 담력을 더 키우시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단순무식하긴 하지만 확실히 그게 최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기분이군요. 앞으로 표현에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아주시니 기뻐요."
"……은 형사, 정말 이거 효과 있는 거 맞아?"
"저번에 제…… 덕분에 그 다크템플러 놈 잡은 이야기…… 들으셨다면서요? 이거 분명 도움 돼요. 그런데 한 번은…… 몰라서 그랬다 치고 두 번째에도 부들부들 떠느라…… 아무 것도 못하면 쪽팔려서라도 경찰 못…… 하죠. 꽉 잡고…… 계시기나 하세요."
"허어, 일단 맡겨둬."
반쯤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 어두운 차 안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최재한 경사와 휘영, 그리고 오진우 형사. 앞좌석에는 재한과 휘영이 앉았고, 진우는 뒷좌석에 홀로 앉았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모양새가 영 기이하다. 재한이 큼직한 두 손으로 휘영의 머리 양쪽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 힘이 꽤 많이 들어간 듯 울룩불룩한 재한의 팔 근육이 가늘게 떨릴 정도다.
지금 휘영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꽤 짙은 농도의 붉은색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자꾸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안절부절 서성이는 것처럼 보인다. 예외 없이 찾아온 공포감에 휘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재한의 억센 손이 붙들고 있는 탓에 반 강제로 시선을 고정 당한(?) 상태다.
차선책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눈에 힘을 준다. 공포감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기 위해 일부러 택한 방법이니까.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의 두려움 때문에 머리 전체에 경련이 일고 있었고, 부릅뜬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일 정도다. 무서워서인지, 먼지가 들어가서인지는 알 수 없다.
"참…… 은 경위님다운 방식이라고나 할까…… 글자 그대로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 계시네요."
"그러게. 어떤 상황인지 대충 설명은 들었지만 이건 정말 무작정이로구만."
뒷자리에 앉은 진우의 속삭이는 듯한 말에 재한도 낮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단순히 완력이 더 약하다는 이유로 하늘 같은 선배 재한에게 이 민망한(?) 임무를 떠넘긴 진우는, 그 대신 언제라도 튀어나갈 태세를 갖춘 채 잔뜩 수그리고 있는 상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보이는 거라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뿐이지만, 휘영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참고로 튀어나갈 자세를 가다듬는 중이다.
"시끄……러워. 오 형사는…… 준비나 잘 하고 있어. 조금만 더…… 있으면 딱 붙잡기 좋은 거리까지…… 올 것 같으니까."
"허허허…… 그나저나 참 신기한 일이야. 나도 시력이 꽤 좋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 거리에선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걸 두고 초능력이라고 하는 건가……"
본래 오늘 잠복근무는 재한과 진우, 둘이서 나오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휘영이 자원해서 곁다리로 붙은 것. 정영태 팀장도 개인시간을 써서 팀 일을 돕겠다는 휘영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팀원들의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보자면 권한을 강력하게 밀어붙여서라도 반려시키는 게 옳다.
하지만 애초에 휘영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기도 했고, 구태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전적으로 팀원들을 신뢰하는 관리자다. 인원이 하나 늘어난다고 해서 동선이 꼬인다거나 돌발변수에 대응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이었다. 재한과 진우 두 사람만 왔었다면, 오늘 잡으려던 놈이 근처에 와 있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테니까.
"오…… 온다…… 조금만 더 오면……"
여전히 가늘게 떨리는 휘영의 목소리가 낮은 톤으로 흘러나온다. 대략 몇 십 미터 정도 거리. 관리가 허술한 듯 먼지가 잔뜩 끼어버린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로 비니 모자를 눌러쓴 사내의 모습이 재한과 진우의 눈에도 어렴풋이 보인다.
특별히 눈에 띄는 뭔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선 채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리는 모습만으로도 영 부자연스럽고 수상하다. 어차피 휘영의 눈에 짙은 핏빛의 아지랑이가 보이는 상태라고 했으니 애초부터 의심의 여지 같은 건 없었지만.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사내는 길가에 주차된 차량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수배 리스트에 오른 뒤 꽤 오랜 시간 도망을 다닌 탓일까. 강력사건만 십 년 이상 맡아온 재한이 보기에도 혀를 내두를 만큼 예민한 촉이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말이지…… 느릿하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그는 세 사람이 타고 있는 차량 쪽으로 다가온다.
"……이거이거,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가야 할 수도 있겠…… 어, 어, 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던 사내가 별안간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진우가 먼저 뛰어나갔다. 앞에 앉았던 재한 역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추격에 나선다. 홀로 남은 휘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툭툭 때리며 위축되는 스스로를 한 차례 가다듬고는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지홍은 다른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겨둔 채 집에서 누군가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큼직한 벽걸이 모니터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떠올라 있다. 노인의 뒤쪽으로는 오래된 도서관처럼 책이 빼곡히 꽂힌 서가가 보인다.
노인은 커다란 의자에 몸을 묻고 두툼한 책 한 권을 펼쳐 든 채로 이따금씩 모니터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지홍 역시 테이블 위에 와인과 치즈를 갖다 놓고 이따금씩 손을 뻗으며 통화에 임한다. 격식 같은 건 차릴 필요가 없는, 꽤나 가까운 사이인 듯하다.
[그래, 단순히 덜덜 떨기만 한다는 건가? 다른 증상은 없고?]
"식은땀을 흘리는 것까진 봤는데, 겉으로 봤을 때는 그 정도입니다. 이상한 건가요?"
[흠…… 이상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뭔가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긴 한다네. 본래 인간의 육체가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말일세. 불수의반응(不隨意反應), 그러니까 중추 통제 기관의 명령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어나는 증상이 따르거든. 그쪽 생체 구조에 따르면 중추 통제 기관은 뇌를 말하는 거겠지.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그 중 하나일세.]
"부자연스럽다는 건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가요?"
[자네가 설명한 내용만 가지고 추론하자면…… 우선 이불로 온몸을 감쌌다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뭐가 됐든 스스로의 신체를 숨기려 한다는 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지. 꽤 심각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거야.]
지홍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휘영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덜덜 떨며 말을 띄엄띄엄 하긴 했지만, 말투나 성량으로 봤을 때는 '심각한 공포'라는 단어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모습이다.
"어……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시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요?"
[그 정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선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건 기본이고 눈동자가 커지게 마련이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라고 봐야겠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어서 맨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일 수도 있고. 또,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거나 침샘이 바짝바짝 마르게 되고, 더 심해지면 요도나 항문 주위의 근육이 열려서……]
"……잠깐, 잠깐. 선생님, 잠깐만요. 그…… 제가 지금 좀 민망한 상상을 하게 돼서 그러거든요? 그러니 거기까지만 부탁 드려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로 민망해하고 그러나?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면서.]
"그러게요. 아무래도 이쪽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신체리듬도 이쪽을 따라가나 봅니다. 제가 이쪽에서는 꽤 젊은 축에 속하거든요. 아무튼 공포반응은 그렇다 치고, 원인으로 볼 만한 건 뭐가 있을까요?"
[흐음…… 생체나 심리 같은 것에 관해 연구했던 게 워낙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하군 그래. 대략 생각나는 거라면 아무래도 트라우마(Trauma) 계통으로 보는 게 무난하지 않을까 싶네.]
지홍은 심리상담 같은 걸 권했던 자신의 방법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노인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신체반응이 너무 제한적인데요. 제가 본 것 중에는 아까 말씀하신 증상의 절반도 채 나타나질 않았어요. 설마 의식적으로 억누르거나 하고 있는건 아니겠죠?"
[그건 내가 구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지 않겠나. 다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이야기해주자면, 글자 그대로 불수의반응일세. 의식적으로 뭘 하고 말고 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거란 말이야.]
"아…… 하긴, 그렇겠군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지. 자네가 맡고 있는 케이스가 어떤 존재인지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네.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겠지만, 그들에게는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 적용되지 않을 여지가 얼마든지 존재하니까.]
"……그렇군요. 선생님이 아시는 선에서 감이 잡히는 건 전혀 없으십니까? 몇 생을 바쳐서 공부만 하신 분인데 뭐라도 짚이는 바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자네답지 않게 적극적이구만? 그 처자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모양이야.]
"……선생님,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요즘 그 사람이 제가 누구랑 뭘 하고 다니는 지를 죄다 알고 있단 말입니다. 분명 제 주위에 누굴 심어둔 거 같긴 한데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찾아볼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두들겨 맞아서 돌아가는 건 절대 사절입니다."
[홀홀홀, 여전하구만. 자네도, 자네 임자도. 흐음…… 하나 예상하는 바가 있긴 한데. 원래 난 확인되지 않은 가설은 외부에 공유하지 않는 주의이네만, 이번엔 자네 부탁이니 예외로 치도록 하지. '희석된 악몽'이라고 내 나름대로 개념을 붙여본 가설이라네. 한 번 들어볼 텐가?]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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