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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4.

by 이글로

"그러니까…… 휘영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길래 시키는 대로 쫓아갔더니, 그 놈이 앞서 지나갔던 여자를 덮치려던 걸 발견하고 현행범으로 잡았다?"


이튿날, 오진우 형사는 출근하자마자 전날 밤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렇다니까요! 저 진짜 완전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그래~ 제대로 한 건 했구나. 피해자 분은 어떻게 했고?"

"뭐 제가 별달리 할 게 있나요. 그냥 집까지 잘 모셔다 드리고 연락처나 드리고 왔죠 뭐."

"그 정도면 잘했어. 아이고…… 아주 그냥 온몸을 블랙으로 도배를 하셨네? 무슨 다크템플러라도 되고 싶으세요? 이건 뭐, 범죄자 인권도 존중해야 된다는 세상이라 말도 함부로 못하겠고…… 예전 같으면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갈겼을 텐데."


정영태 팀장은 까만 옷을 입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내를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진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무슨 저승사자라도 보신 것마냥 갑자기 덜덜덜 떠시는데 일단 거기서 겁이 덜컥 났죠. 근데 갑자기 소리를 막 지르면서 쫓아가라고. 근데 뭐가 보여야 쫓든지 말든지 하죠. 아마 차 앞으로 붙어서 지나가지 않았으면 끝까지 몰랐을 걸요? 그 컴컴한 데서 저런 어두운 색 옷으로 도배한 사람을 알아채신 것도 신기한 노릇인데…… 서둘러 뛰어갔더니 딱 직전에 체포할 수 있었던 거 있죠. 와~ 이건 진짜, 대박사건."

"……흐음……"


잔뜩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진우. 처음에는 흥미롭게 듣던 영태는 갑자기 뭔가 답답해지는 느낌에 턱을 어루만진다. 최근 며칠 휘영이 보여줬던 이상한 모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다 죽어가던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모습, 그러다가 며칠 만에 기력을 되찾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던 것, 야간 잠복을 지시하려 했을 때 겁에 질린 채 헐떡이던 목소리, 아무 것도 아니라며 뭉뚱그리려던 태도까지. 때가 되면 말하겠지, 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팀장님. 은 경위님은 안 보이네요? 어제 확실히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어, 안 그래도 전화와서 좀 늦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근데 목소리가 영 아니길래 그냥 쉬어도 된다고 해둔 참이야."

"에…… 저는 출근했는데 왜 은 형사님만…… 이거 역차별 당하는 기분인데요."

"이런 칙칙한 곳에 존재마저 귀하신 홍일점 아니냐. 억울하면 너도 여자로 다시 태어나서 여기 지원하든가. 물론 안 받아줄거지만."

"와~ 팀장님, 진짜.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깁니까? 와, 대박. 우리 팀장님이 성 차별을 하시다니."

"시끄러워, 임마. 잠복한 주목적이 뭔데 그쪽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주제에…… 우연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 건 올렸으니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아. 저 다크템플러 같은 놈이나 얼른 처리해놔."

"쳇…… 알겠다구요."






지홍은 팔짱을 낀 채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요즘 들어 하루하루가 참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의 눈앞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만 간신히 내밀고 있는 휘영이 앉아 있다. 침대 위에 앉아 온몸을 이불로 칭칭 감고 있는 모양새가 몸살감기 환자를 연상케 한다.


이른 아침부터 뜬금없이 걸려온 휘영의 전화. 전날 단골 손님을 상대하며 술을 꽤 많이 마셨던 탓에 만사가 귀찮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겁에 질린 휘영이 횡설수설한 것도 있었지만, 마치 종을 치듯 계속 뒷골이 울려대는 통에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직접 찾아왔고,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이 괴이한(?)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첫 만남엔 멱살잡이에 그 다음엔 제 가게 앞 쭈구리였었나요? 거기에 오늘은 은둔형 외톨이 코스프레…… 알게 된지 얼마 안 됐다고 생각하는데 짧은 시간 동안 참 버라이어티한 매력을 보여주시는군요."

"……시, 시끄러워요."

"그러니까, 붉은 아지랑이같은 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야간근무 중에 그 아지랑이가 유독 진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걸 쫓아가도록 했더니 현행범으로 잡았더라. 전화로 하신 말씀을 정리해보면 이 정도인가요? 제가 지금 머리가 꽤 아파서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군요."

"저도 지금…… 멀쩡한 정신이 아니라서 디테일하게 바로잡……지는 못하겠네요. 말씀하신 게 대략적으로는 맞으니…… 아무래도 이게 그때…… 했던 이야기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하아……"


그 동안 '깨어남'과 관련해 꽤 많은 케이스를 봐온 지홍이다. 사실 너무도 익숙한 패턴.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깨어남과 그에 따른 능력 발현 과정이라는 촉이 강하게 왔다. 능력의 계열도 그리 특이하지 않은 편이라서 가능성은 더욱 높다.


문제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음에도 휘영이 아직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한결 더 아파온다. 손오공이 머리의 금고아가 조여질 때 이런 기분일까.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시던 전화 너머 어떤 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이거 봐, 이거 봐. 문제 생길 거라 그랬잖아…… 에휴, 그나저나 발현이 되도 꼭 그 쪽으로…… 거 참 뼛속까지 경찰이시로구만. 그쯤 했으면 지겨울 때도 되지 않았나?"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생각은 않고."

"제가 무슨 찾으면 다 나오는 포털 백과사전인 줄 아십니까. 저라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는 않아요. 좀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으니 시간을 좀 주시죠. 그나저나 집에 계시면 뭐 볼 일도 없을 텐데 왜 그러고 계시는 건지?"

"꿈에서…… 그 장면이 자꾸 나왔어요. 지금도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구요."

"그렇군요. ……얼른 나아지길 바라겠습니다. 그 코스프레 별로 안 어울리시거든요."

"자꾸 그딴 소리…… 할 거면 그냥 좀 가버려요. 가뜩이나 심란한데……"






백발의 남자는 의자에 앉아 자세를 고친다.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오른쪽 팔꿈치로 책상을 짚었다. 오른손은 반쯤 말아 쥐고, 네 손가락으로 광대 언저리를 받쳤다. 머리의 무게가 실린 탓에 볼살이 살짝 눌린 중년의 얼굴에는 곤란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그는 책상 너머에 선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던진다.


"하…… 뭐야, 그게 대체. 깨어난 건지 자각이 없다? 능력은 발현됐는데? 오류 아냐, 그거?"

"조금 전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분명 깨어난 건 맞는데 아직도 자각이 없는 상태라고 하네요. 일단 시간을 벌어두었다고는 하는데, 그리 여유롭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말씀하신 것처럼 오류로 처리해야겠지만, 아시다시피 기억 누적에 관한 가설들은 대부분 검증이 안 된 것들이라……"

"거 참 미칠 노릇이구만. 어떤 종류의 능력인지는 알아냈고?"

"다행히 현재 담당자가 이쪽으로는 경험이 꽤 많습니다. 시각 계열이고, 감지 또는 통찰력 쪽인 걸로 보고 있긴 한데 자세한 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외의 특이사항으로는…… 경찰대 우등생 출신에 현직 강력계 형사입니다. 물리적 전투력의 성장도 아직 여지가 남아 있구요."

"자각이 없는 상태인 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큰 문제는 없는 건가…… 새벽뫼에서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연구 중이래? 얘네들 일 너무 안 하는 거 같은데."

"그게…… 연구원 대부분이 돌연변이 문제에 매달려 있는 지라 기억 누적까지 커버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는 입장입니다. 기억 누적에 대해서는 수석 연구원 한두 명 정도만 투입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돌연변이 이야기가 나오자 백발 남자의 표정에 확 짜증이 서린다. 하긴, 일의 순서를 따지자면 이쪽이 먼저다. 그가 모시고 있는 이는 질서 유지와 더불어 자연스러움을 무척이나 중시하는 존재. 결과가 불투명한 신(新) 분야 연구보다는 어긋난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오랜만의 호출에 내심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둘의 만남에 있어서 먼저 찾아가는 건 거의 항상 백발 남자 쪽이었고, 그의 주군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그를 호출하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저 돌연변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공식적으로 허락 받았을 뿐.


"젠장! 이게 다 그 놈 때문이야! 이쪽 연구에만 온 힘을 다한다 해도 언제 성공할지 장담할 수 없는 마당에 이 머저리 같은 놈이 제 욕심을 채우겠다고 분탕질을 치고 다니니…… 일단은 별 수 없어. 지금 상황에서 연구 결과만 기다리다간 닭 쫓던 개 꼴이 될지도 몰라. 그냥 가능한 한 솔직하게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도록 하고, 가급적 밀착해서 관리하라고 해. 혹시라도 그 정신 나간 놈이 눈치채면 또 초를 치려 들지도 모르니까."

"분부대로하겠습니다, 왕이시여."


말을 끝낸 백발 사내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고른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뭔가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지만, 이미 타이밍은 늦은 듯하다. 이윽고, 백발 사내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더니 한결 가벼워진 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조금 전까지 한숨을 쉬고 짜증을 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말투가 화제를 바꿔놓는다.


"야, 닭살돋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냐?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다들 왕이라 부르는 거냐. 그리고, 너도 그렇고 다들 내 앞에서만 되게 점잖은 척 한다며? 니들끼리는 막 깨방정도 떨고 그런다고 다 들었어."

"어떤 노…… 아니, 어떤 친구에게서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다소 오해가 좀 있으신 듯합니다. 원래 직장상사 앞에선 다 그런 거죠. 불천님도 그 분 앞에 가면 그러시지 않습니까?"

"……크흠, 흠. 그 분은 예외야. 보면 볼수록 너무 어려운 분이거든.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릴 것 같단 말이야. 영혼이 한 조각 단위로 막 곤두설 것 같은 공포를 네가 어찌 알겠냐."

"그건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불천님께서 명부에 줄 그어버리실까 무서워서요."

"뭐 임마? 내가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할 것처럼 보인다 이거야? 진짜 날 잡아서 한 번 확 그어버릴까 보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진짜 무서우니까. 아무튼 호칭에 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홍이 다시 연락을 해온 건 불과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오전에 비해 한결 증세가 나아졌다고 느낀 휘영은 후드 집업을 뒤집어쓰다시피 입고 큼직한 스냅백까지 눌러 쓴 채 밖으로 나섰다. 지홍이 기다리고 있다는 집 근처 단골 카페까지는 불과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 그 와중에도 붉은 아지랑이는 간헐적으로 눈에 띄었고, 그때마다 휘영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움찔 고개를 돌리곤 했다.


"어서 오세요~"


단골 카페의 주인이 건네오는 인사에 휘영은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지만, 잔뜩 긴장한 탓에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라갈 뿐이다. 다행히 카페에 사람은 거의 없었고, 붉은 아지랑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홍은 너무 눈에 잘 띄는 창가 쪽 자리에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불 속에서 벌벌 떨던 기억 탓인지, 그 거만한 자세부터가 제대로 거슬린다. 으휴, 저 밉상……


"오셨네요. 앉으시죠."

"……"

"취향은 잘 모릅니다만, 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주문해 뒀습니다."

"네, 고마워요."


홀짝- 홀짝- 말 없이 차 몇 모금을 마시는 짧은 시간.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붉은 아지랑이를 볼 때마다 계속 움찔거리긴 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듯하다. 따뜻한 차를 마신 덕분일까? 아니면 마주앉아있는 이 사람이 해결책을 가지고 왔을 거라는 믿음 때문일까? 아무튼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 이불을 뒤집어써야 할 정도의 막연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지홍이 먼저 말을 꺼낸다.


"음, 구태여 시간 끌이유는 없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설명을 드리죠."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듯하다. 이런 긴장감, 초임 시절이나 강력계 형사로 선발될 때 마지막으로 느꼈던가? 휘영은 바짝 올라간 집업의 지퍼를 괜스레 한 번 더 만지작거리고 몸을 바짝 당기며 지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 지금 보이시는 붉은 아지랑이? 네, 아무튼 그건…… 쉽게 말하자면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은 경위님은 그걸 볼 수 있게 된 거죠. 일종의 초능력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겠네요."

"……뭐라……고요?"


이 사람의 이야기는 완곡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법이 없다. 어느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화법에 기승전결 따위를 기대하는 건 사치일 뿐이다. 몇 번의 경험으로 그걸 깨달았기에, 사실 오늘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에, 당연히 부연 설명을 좀 드려야겠죠? 왜, 그런 말이 있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천 조각으로 이루어진 직소퍼즐 같은 걸 연상하시면 이해하시기 수월할 겁니다. 그 중에서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조각도 있고,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조각도 있습니다. 그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흔히 말하는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거죠. 여기까지는 대충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휘영은 생각에 몰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누군가를 가리켜 '걔 성격이 어때?'라고 물으면 대개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법이다. 기본적인 성향이나 어떤 상황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부터 사고방식이나 가치관까지, 사람의 성격을 논하기 위한 접근방향은 무척 다양하니까. 성격, 천성, 성질, 기질 등등 비슷한 듯하면서도 엄밀하게는 다른 뜻을 가진 단어들이 머릿속을 채워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유동적으로 변하는 조각들입니다. 이걸 다시 분류해보면 어떤 조각들은 장기적인 패턴을 보이는데 반해, 또 어떤 것들은 변하는 주기가 매우 짧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개인적으로 겪었던 어떤 일로 인해 기분이 나쁜, 뭐 그런 거죠."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기분이 꿀꿀할 때 일탈을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바로 여기 실마리가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일탈 중, 기존까지 믿고 따르던 사회질서를 부정해보면 어떨까 하는 망상 수준의 생각. 그게 은 경위님 눈에 보이게 된 거다, 이 말이죠."

"아니, 잠깐만요. 범죄 가능성이라면서요? 단지 상상한 것만으로 그걸 범죄 가능성이라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아아, 끝까지 들으세요. 물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무념무상으로 있던, 혹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너그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으로나마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띠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 어느 쪽이 더 높다고 생각하시나요?"

"……"

"말씀하신 대로,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 잠정적 범죄자 취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화가 나면 누구나 그런 생각 한두 번쯤은 하게 마련이니까요. 아마 그 붉은 아지랑이의 색깔이나 짙은 정도 같은 걸로 구분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몇 가지 기억이 스쳐간다. 왕십리 역 광장에서 봤던 불그스름한 분홍색 정도의 아지랑이. 그리고 어젯밤 뚜렷하게 느꼈던 진한 핏빛에 가까운 아지랑이. 그래, 그 차이였구나! 꽉 막혔던 생각이 조금 정리되는 듯하다.


"표정을 보니 이해하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이거보다 쉽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럼 이 두려운 느낌은 뭐죠? 지금까지 온갖 미치광이 같은 범죄자들을 꽤 많이 상대해봤지만 그때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는데요."

"음…… 글쎄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그것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일단 능력과 연관된 부분은 아닌 것 같네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비슷한 사례로 미루어 가설을 하나 세워볼 수는 있습니다. 은 경위님의 무의식 어딘가에 묻혀 있는 나쁜 기억 같은 것에 반응해 의식이 먼저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럼 원인을 찾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덜덜 떨면서 살아야 한다는거예요? 형사 체면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제 가설이 옳다면 원인은 은 경위님 자신에게 있을 테니까요. 안타깝게도 전 바텐더지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가 아니라서……"

"생각보다 참 무책임하시네요."

"어허, 이 분 말씀 참…… 애초에 제가 은 경위님한테 책임질 일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저 임자 있는 몸입니다. 그런 오해의 소지 다분한 발언은 삼가 주시죠."

"……뭐라는 거야, 이 음란마귀 같은 아저씨가."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휘영이 작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는게 지홍의 탓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그 날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인상이나 말투 같은 게 꽤 기분 나빴지만 그건 논외로 두고……


"대략 어떤 기분이실지 짐작은 합니다. 별로 위로는 안 되겠지만요. 아, 혹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거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이 바닥에 적응해서 살아가다 보면 아마 느끼게 되실 겁니다. 은 경위님이 무슨 백 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구한 운명 같은 건 아니거든요. 물론 흔한 것도 아니긴 합니다만……"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그 위에 한 술을 더 얹어놓는다. 가뜩이나 붉은 아지랑이 때문에 예민해있던 휘영은 왈칵 짜증이 났다.


"……뭐라는 거예요, 대체? 지금까지 해준 말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것까지 더해놓으니 무슨 소린지 정말 모르겠네. 어쨌든 그러니까,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 자체는 그쪽 표현을 빌리자면 내 '능력'과 관계된 거고, 이렇게 덜덜 떠는 건 그쪽 소관 밖이라 이거죠?"

"어…… '너 되게 무능력하구나?' 같은 뉘앙스가 풍기긴 합니다만 핵심은 그렇네요."

"됐어요, 그럼. 집에 가서 또 혼자 이불 싸매고 덜덜 떨고 있을 테니 꼴사납다고 비웃지나 말아요."

"아, 저기……"


지홍은 뭔가 할 말이 더 생각나 급히 말을 꺼냈지만, 휘영은 이미 일어서서 카페를 나서고 있었다.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미지근해진 캐모마일 차만 반쯤 남아있다. 허허허, 역시 만만치 않은 아가씨…… 앞으로 고생께나 할 듯한 밑그림이 그려진다.


"흠…… 다른 이상한 놈이 접근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네. 요새 이 주변 기운이 뒤숭숭한게 뭔가 더 크게 터질 것 같은 재수없는 예감이 드는데……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지홍은 다시 의자에 편하게 기대 앉았다. 도울 수 있는 게 없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방법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케이스. 그는 잔을 들어 온기가 반쯤 사라진 차를 또 한 모금 마신다.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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