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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3.

by 이글로

"한평생을 착하게 살아왔다고 해서"


여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한복을 베이스로 삼은 디자인의 옷차림. 연한 푸른색 상의와 붉은색의 치마가 대비돼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차분한 걸음걸이로 그녀는 창가에 놓인 화분들 쪽으로 다가간다. 말라버린 잎 몇 개를 세심하게 어루만지며 말을 잇는다.

"반드시 복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에는 타인을 배려하며 살고자 하는 존재들이 더 많아질까요? 아니면 자기 이득만을 생각하는 존재들이 더 많아질까요?"


여인의 손길이 닿자, 메말랐던 화분의 잎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떨어질 것만 같던 조그만 잎에 다시 생기가 돌더니 파릇파릇하게 바뀐다.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답이 무엇이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처량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모두가 그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속임수 같은 건 아무렇지 않게 쓴다는 것을요."


여인의 뒤편,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시립해있던 사내. 짙은 그레이 계통의 콤비 정장을 입은 그는 여인에 비하면 평범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새하얀 백발 탓에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순리였습니다. 그는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과정을 너무 가벼이 여겼고, 그에 합당한 처사를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이 많은 문제들 또한 결국 그가 뿌려둔 씨앗이었음에도,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후후, 그렇게 볼수도 있겠군요."

"여전히 지켜보기만 하실 요량이시군요."

"애초에 제 역할이니까요. 게다가 지금 뭔가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겝니다. 어쩌면…… 그도 나름대로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걸지도 모르죠. 속임수를 썼다 한들,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 것 역시 결국은 제 불찰이에요. 다만 안타까운 건……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는 사이에 상처받으며 돌고 돌 가련한 영혼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이번 일……처럼 말이죠."


사내는 고개를 들어 여인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창가의 화분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봐온 만큼, 그는 여인의 뒷모습만 보고도 지금 심정이 어떤지를 잘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인코자 합니다. 만약, 준비가 된다면 움직일 의향은 있으신 겁니까?"

"……지금까지는 망설여졌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어긋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든다면 응당 그렇게 해야죠. 그게 내 존재 이유이니."


존재 이유라는 말에 사내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리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다. 그간 몇 번이고 지적했지만, 고집스럽게 그 표현을 사용하는 여인을 도무지 당해낼 수 없었다. 이제는 그도 구태여 문제삼지는 않지만, 여전히 듣기에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알겠습니다. 기필코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 할 것입니다."






터덜터덜, 휘영은 거리로 걸어 나왔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다. 술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아니, 이건 애초에 마신 술의 양이 문제가 아니다. 정신을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게 만들었던 한바탕의 장황한 이야기 탓이지. 휘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있다가 자신의 볼을 꼬집어봤다. 뻔한 방법이지만 뻔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아! 아프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고전적인 방법(?)으로 검증한 결과 일단 꿈은 아니다. 얼마 전 끊임없이 반복되며 잠을 좀먹던 악몽에서처럼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저 말이 다 진짜라는 거야? 하, 참 나…… 이건 무슨 판타지 소설이나 공상과학 영화도 아니고.


'판타지나 SF 같다, 라고 생각하실 테죠? 뭐, 이해합니다. 말씀드렸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지금 하는 이 뻘소리를 벌써 몇 번이더라…… 아무튼 꽤 많이 해봤거든요? 근데 들은 사람들 반응은 거의 한결 같습디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 역시도 그랬던 것 같고요. 원래 사람이라는 게,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잘 안 믿곤 하는 법이니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야기하는 본인조차도 쿨하게 인정해버리니 뭐라 타박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계속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믿어지지 않아도 믿어질 때까지 계속 믿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증거라고 하긴 좀 애매하지만…… 은 경위님, 요 며칠 꿈 꾸신 적 없죠? 그 왜 있을 텐데. 죽음과 관련된 자각몽이라고 해야하나? 사람마다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다르긴 한데 큰 틀에서는 비슷하거든요.'


지홍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래, 지홍을 처음 만난 뒤 곧장 휴가를 반납하고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 이 곳을 찾아올 때까지 며칠. 예의 그 꿈을 다시 꾼 적은 없었다. 물론 그의 입으로 말했듯, 그 사실이 간밤에 들은 말도 안 되는 스토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꿈을 꾸는지 안 꾸는지, 그리고 무슨 꿈을 꿨었는지를 알고 있다. 따로 이야기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홍 역시 그 꿈을 꾼 적이 있거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좀 더 나아가, 그 꿈이 '간밤에 들었던 판타지 소설'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도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


"그럼 앞으로…… 아, 모르겠다. 머리 아파 죽겠네. 일단 잠 좀 자고 생각해야겠어. 저 인간 저거, 술에 뭐 이상한 약 같은 거 탄 건 아니겠지?"






창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의 태양빛이 바 내부의 조명들을 무색하게 덮어버린다. 지홍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햇빛을 만끽한다. 잠시 후,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귀찮다는 듯 미간을 확 찌푸린 표정으로.


[……흐아암~ 꼭두새벽부터 먼저 연락한 걸 보니 뭔가 진척이 좀 있었나 봐?]

"이 형님이 노안이 오셨나. 꼭두새벽은 개뿔. 해 뜨고 있거든요? 진척이라기보다는 뭐, 특이사항 보고는 해야 하니까 연락 드린 겁니다. 밤새 설명하느라 죽는 줄 알았네. 그 여자, 술 엄청 먹더만요. 돈 안 받겠다고 했더니 진 한 병을 거의 다 비웠어……"

[진? 한창 잘 나가는 바텐더라면서 그 정도 가지고 쩨쩨하게 그러냐? 그거 얼마 안 하잖아?]

"얼마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전 뭐 가게 바닥 들추면 돈이 쏟아진답니까? 나도 다 발품 팔고 사람 써 가면서 구해오는 술이거든요? 게다가 여기 월세만 해도 얼만데……"

[하, 자식. 알았으니까 다큐로 받지 말고. 무슨 말을 못해요 정말. 이러니 내가 너를 좀 보내버리고 싶어하는 거다. 그냥 이번 생은 바텐더로 눌러앉으라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줄게.]

"이런 기억 쌓아서 어디다 쓰라는 겁니까? 일 없거든요. 그나저나 이런 잡설 늘어놓으려고 연락 드린 게 아닌데. 거 자꾸 말 좀 돌리지 마요. 맨날 바쁘다고 징징거리는 양반이."

[음? 아 맞다. 그랬었지. 그래서, 어디까지 설명한 거냐.]


이 사람이랑 이야기하면 항상 이렇다. 프롤로그가 너무 길어…… 지홍은 벌써 짜증으로 인해 갈증이 치미는 것을 느낀다. 그는 정수기 쪽으로 가서 시원한 물을 한 잔 받아 들이킨 뒤 말을 받았다.


"정확히 어디까지 설명했다고 하기가 좀 그래요. 은휘영 씨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게 아니라, 그 폭발사고의 원인 쪽이거든요. 주입식으로 떠들어봐야 언젠가 다시 설명해야 할 게 뻔하니, 이번엔 그냥 원하는 것만 알려주자 싶어 포인트를 그쪽에 맞췄죠. 그러다 보니 정작 깨어난 자들이 알아둬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건너뛴 것들이 꽤 있어요. 아놔, 이래서 내가 특이 케이스를 안 맡으려고 하는 건데."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만 문제 없으면 되잖아? 살펴보니 딱히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하니 그리 오래지 않아 받아들일 거 같은데. 그때까지 잘 좀 가르쳐봐.]

"문제가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잖습니까, 지금. 애초에 저 나이에 깨어난 것 자체가 이미 이레귤러(irregular)인 건데."

[그게 꼭 법칙에 어긋난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기억 누적에 관련된 현상은 뭐가 됐든 아직 자료가 한참 부족하니까.]

"난 어려운 이야기는 모르겠고, 좀 물어나 봅시다. 왜 꼭 이런 복잡한 케이스는 나한테 시키는 건데요? 매번 같은 설명 반복하게 하고. 내가 무슨 역사 선생입니까?"

[그랬나? 그러고 보니 너한테 맡기면 항상 별탈 없이 깔끔하게 굴러가는 것 같던데, 이참에 선생 쪽으로 진로를 바꿔보는 건 어때?]

"에헤이, 거 아무나 역사만 가르치면 다 선생 되는 줄 아시나. 이 분 이거 교육자 명예훼손 하시네. 이 분야 제대로 연구한 양반들이 그쪽에 떼거리로 있는 걸 뻔히 아는데. 게다가 애초에 제대로 깨어난 케이스 좀 붙여주면 이렇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잖아요. 방향만 대충 잡아주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아. 솔직히 말해봐요. 나 싫어해서 그러죠?"

[그럼 내가 널 좋아할 줄 알았냐. 툭하면 쌍소리 내뱉으면서 기어오르는 후배 놈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거 아님?]

"제길. 두고 봅시다. 그쪽 넘어갈 일 있을 때 내가 아주 그냥…… 그건 그렇고, 이번엔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워요. 원래도 한 성깔 하는 데다가 나름대로 고집도 있고, 무엇보다도 경찰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대해 자부심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게 너무 강해요. 이대로는 언제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니까?"

[놔둬. 그것도 그 분의 뜻일 테니까. 은휘영 씨는 우리 도움이 필요해지면 스스로 찾아올 거다. 넌 그때만 신경 써주면 돼. 이젠 먼저 찾아가라고 시킬 일은 없을 거야. 사랑하는 후배님, 이번 일 그럭저럭 잘 해낸 것 같으니 상 줄게. 뭐 필요한 거 없어? 말만 해.]

"그냥 좀 닥쳐주시고 한동안 연락 좀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힝, 너 미워 임마.]






휘영은 문득 거울을 들여다봤다. 자신의 모습이지만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본래 그녀는 거울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이리저리 사건에 쫓기다 보니 꾸미고 다닌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다. 그것과는 좀 다르다.


분명 자신의 모습인데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구태여 말로 표현하자면 '타자감(他者感)'이라고 할까? 어쩌면 이것이 얼마 전 지홍에게 들었던 '깨어남'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들의 말에 따르면 휘영은 이제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상태. 하지만 정작 겉으로 봤을 때 특별히 다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정상적으로 깨어난 경우라면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딱 느끼게 됩니다. 마치 기억이 주입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은휘영 씨 같은 경우는 일종의 예외에 해당합니다. 즉, 스스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죠. 지금 상태로 미루어 보건대…… 확실히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홍이 해줬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깨어난 상태'인데 스스로 알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던 탓에 느끼는 일시적인 기분인 걸까? 문득 휘영은 지홍이 일러준 '확인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번잡한 곳에 나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라고 했던가……"


사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지홍은 '일단 해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별 반응이 없으면 다음 수단도 준비돼 있다는 말과 함께. 시종일관 까칠한 말투로 신경을 박박 긁던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꽤 진지했다. 뭐, 밑져야 본전인 일. 휘영은 그냥 잠시 미친 짓 하는 셈 치고 한 번 따라보기로 마음 먹었다.






"……뭐야, 이거?"


눈을 몇 번 비벼본다. 시력에 뭔가 이상이 생긴 걸까? 한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탓일까?


왕십리 역. 2호선, 5호선, 분당선, 경의-중앙선까지네 개 노선이 지나는 러시아워(Rush Hour)의 핫플레이스. 점심 때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역시 사람은 차고 넘치게 많다. 휘영은 역 건물이 정면으로 보이는 거리에서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 '가만히 지켜본다'는 추상적인 행위만으로 뭔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이상현상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휘영은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와중에 문득, 몇몇 사람들이 약간 불그스름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다시 바라봤지만 똑같았다. 몇몇의 머리 위,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붉은색 기운이 일렁이는 모습.


"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온몸을 훑어 지나는 듯한 오싹한 기분과 함께 '두렵다'는 생각이 왈칵 치밀었다. 수많은 강력범죄자들을 대면할 때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 휘영은 견디지 못하고 역 반대편, 광장 바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붉은 아지랑이가 보이는 사람들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무조건,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달린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지만, 그저 정신 없이 달린다.






"헉… 헉… 헉… 후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멈춰 섰다. 가쁘게 차오르던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제서야 휴대폰이 계속 울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휴우…… 여보세요?"

[뭐냐, 숨소리가 왜 이리 거칠어? 무슨 일 있어?]

"아, 팀장님. 아니에요, 아무 것도."

[내가 그런 류의 대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말 못할 사안인가?]

"아직은요."

[그래? 그럼 뭐 때가 되면 알아서 말하겠지. 아무튼, 오늘 밤에 진우랑 같이 잠복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최 형사가 가기로 돼 있었는데 변동이 좀 생겨서 말이야. 혼자 조사하겠다던 그 사건은 좀 진척이 있나?]

"진척이 있건 없건 팀 일을 먼저 해야죠.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그럼 이따가 진우랑 직접 연락해서 합류하도록 해.]

"네."


전화를 끊고 보니 부재중 전화 5통이라는 알림이 보인다. 발신자는 모두 정영태 팀장. 착신이 다섯 번이나 끊길 정도로 오래 뛰고 있었나…… 문득 다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드물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아까와 같은 붉은 아지랑이는 보이지 않는다. 급박하게 쿵쾅대던 심장이 천천히 본래 속도를 되찾아간다.






"……"


골목길 한 켠에 늘어선 차량들 중 하나. 불 꺼진 차량의 운전석에 앉은 오진우 형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조수석을 반쯤 뒤로 젖힌 채 앉아있는 휘영의 얼굴을 살핀다.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휘영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뭔가 부자연스러운 낌새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빤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진우의 시선.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음…… 안색이 영 안좋으신데. 아직 컨디션 안 돌아오신 거 아니에요?"

"깜깜한데 뭐가 보이긴 하니? 실없는 소리 하긴."

"아녜요. 은 경위님 얼굴은 항상 블링블링 빛이 나서 잘 보이거든요."

"……아, 닭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농담 하지 마. 무섭다."

"농담 아닌데. 진짠데……"

"그럼 변태 같으니까 그만둬."

"히잉……"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주위가 온통 조용해서인지,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곧 휘영과 진우가 앉아있는 차창 옆으로 늘씬한 여성 한 명이 지나쳐간다.


"……!?"


휘영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간격. 희미한 발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어두운 빛깔의 옷을 입었는지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발소리가 들리는 언저리에서 휘영은 붉은 아지랑이를 발견했다. 낮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훨씬 짙은, 핏빛에 가까운 아지랑이. 그녀의 표정은 다시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 오 형사."

"네? 저 부르셨…… 어? 은 경위님, 왜 그래요? 얼굴이 완전 창백한데."

"저기, 저 사람. 쫓아가. 빨리."

"네? 누구요? 안 보이는......"


그때, 무언가가 빠르게 차창 옆을 지나간다. 분명 사람의 기척. 휘영은 이빨을 딱딱 부딪칠 정도로 심하게 떨다가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괜찮으신 거예요? 식은땀 나시는데."

"나, 난 괜찮으니까…… 빨리 쫓아가, 저 사람…… 빨리!"

"네, 아, 네. 그럴게요."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는 휘영. 진우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일단 차에서 내렸다. 방금 전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저벅거리는 발소리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진우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쫓아 달려가고 나자, 휘영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본다. 왜지? 왜 이렇게 두려운 거지?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에 그녀는 한동안 얼굴을 가린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차 안을 가득 채운 어둠 안에서 무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https://brunch.co.kr/magazine/24jh-nove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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