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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2.

by 이글로

두툼한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약간의 빛. 아직 해가 떠있는 시간임에 분명하지만, 실내는 어두컴컴하다. 빛 줄기가 닿는 곳에 자그마한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반쯤 비워진 위스키 병이 놓여있다. 옆에 있는 얼음통 안에는 꺼내둔 지 꽤 된 듯, 물과 반쯤 녹아버린 얼음 조각들이 한데 섞여 둥둥 떠다닌다.


위이이잉-

술병과 얼음통 사이 어딘가에서 진동음과 함께 빛이 번쩍이기 시작한다. 주위가 어두운 탓에 휴대폰 액정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마치 전등을 켠 듯 밝게 보인다. 테이블 옆, 간이 침대에 누워있던 사내가 손을 움직인다. 그는 눈을 가린 안대를 벗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를 몇 번 더듬어 목표물을 찾아냈다.


"……네에~ 전화받았습니다."

[뭐야, 대낮인데 자냐? 뱀파이어도 아니고.]

"……아, 젠장."

[엄훠나. 전화 받자마자 '젠장'이라니. 요즘 너무 대놓고 귀찮아하는 거 아니냐, 너.]

"당최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신 적이 있어야 말이죠. 이번에도 별로 좋은 뉴스가 아닐 것 같다는 스멜이 코를 찌릅니다만."

[역시 촉이 좋구나. 겸손만 갖추면 정말 최고일 텐데 말이다. 최근 도심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깨어남'이 감지됐어. 그런데 아직 너무 약해서…… 아무래도 네가 좀 만나봐야 할 것 같다.]

"아, 그거……? 제기랄, 연말 시즌 준비하느라 바쁜데……"

[대낮부터 한가롭게 처 주무시면서 하실 말씀은 아니신 거 같은데요, 후배님? 바텐더 노릇이 적성에 잘 맞으면 이번 생에서는 그냥 눌러앉는건 어떠냐? 나도 요즘 네놈 육두문자와 하극상 받아주는 게 슬슬 버겁던 참인데.]

"에헤이, 거 누가 들으면내가 매번 형님한테 쌍욕하면서 개기는 줄 알겠습니다."

[이거 봐, 이거 봐. 어쩜 이리 뻔뻔할 수가. 말해두지만, 넌 이미 훌륭한 망나니거든? 에휴, 어쩌다 이런 놈이 내 밑으로 왔누…… 아무튼, 까다로운 케이스가 될지도 몰라. 위에서도 꽤 주목하고 있는 건이니까 서둘러 처리하도록 해. 오늘 당장 움직일 수 있으면 더 좋고.]

"예이~ 예이~"


전화가 끊어지자 사내는 안대를 그대로 쓴 채 휴대폰을 처음 있던 위치에 정확히 내려놓았다. 잠은 이미 달아났고, 영락없이 움직여야 할 판이다. 안대를 벗으며 그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후우…… 귀찮아."






딱히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던가. 막상 식당에 앉아 뜨끈한 찌개를 앞에 두니 군침이 돌았다. 휘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밥 두 공기를 뚝딱 비웠다. 빈 그릇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전화로 '최소 두 그릇'을 강조하던 정영태 팀장의 목소리가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허기가 가시자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울적함도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휘영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텅 빈 집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저리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기를 기다리다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 미안. 한동안 좀 더 울지도 몰라요. 그래도 나, 씩씩하게 이겨내 볼게. 거기서 꼭 지켜봐 주세요. 아프지 말고. 알았죠?"


혼잣말을 하며 휘영은 걸음을 재촉한다. 평일 낮 시간대여서 그런지 골목에는 인적이 무척 드물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평범해 보이는 사내에게 시선이 간 이유는 분명 그 한적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느긋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남자.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짐에 따라 휘영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내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진다? 어째서? 의문과 불안함에 경계심을 피워 올리고 있을 즈음, 그는 자연스럽게 휘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우뚝 멈춘다.


"은휘영 경위님 되시죠?"

"……"


뭘까, 이건. 사실 완전히 낯선 상황은 아니다. 몇 년 간의 경찰 생활 동안 휘영의 손으로 체포한 범인들이 꽤 있고, 그러다 보니 조직폭력배들의 네트워크에서 그녀의 이름이 거론된 적도 있다. 즉, '자신은 모르더라도 상대방이 그녀를 아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는 뜻.


하지만…… 뭔가 다르다. 단서 하나. 폭력조직의 일원이나 현상수배 중인 용의자라면 경찰을 피해 다닐지언정 먼저 아는 체 할 리가 없다. 체포된 범인의 가족이나 지인이 위협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라면 가능성이 좀 있겠지만…… 느낌상 그건 아닌 듯하다. 단서 둘. 이 곳은 지금 휘영이 근무하던 관할구역이 아니다. 전국구로 유명세를 떨치는 슈퍼캅(Super Cop)도 아니고, 평범한 다른 동네 형사 이름과 인상착의를 외우고 다닐 일은 없다고 보는 쪽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단순한 스토커 같은 케이스일까? 잠깐 침묵을 지키는 사이, 휘영은 눈으로 사내의 모습을 훑으며 머리를 굴려본다. 상대방은 슬쩍 미소를 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다.


"어…… 제가 성격이 좀 급한 편이라서요. 다짜고짜 이런 말을 드리긴 좀 그렇습니다만…… 며칠전에 사고로 가족을 잃으셨……"


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영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오른손으로 사내의 목을 움켜쥐고 벽으로 몰아붙인다. 어느새 얼굴에는 경계심과 의문 대신 뚜렷한 분노가 떠올라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취조할 때나 나올 듯 서늘한 목소리.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호흡기를 압박당하면 당연히 얼굴이 찡그려지게 마련. 경찰대 시절부터 신체적 조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던 휘영이다. 완력이나 악력 역시 웬만한 남자들 못지 않다고 자부하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멱살을 잡히면 보통 이상의 압박감을 느껴야 정상이라는 의미. 체급 차이가 큰 상대라면 모를까, 사내의 체격은 평균적인 남자들보다 약간 더 덩치가 있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대답해! 너 뭐 하는 새끼냐고!"

"음…… 제가 뭐 하는 새끼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뭐, 그래도 굳이 알고 싶으시다면 못 알려드릴 것도 없습니다만."


그는 압박당한 상태 그대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휘영의 왼손 쪽으로 그것을 건넨다. 휘영은 명함을 받아들어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사내의 표정에서는 저항할 의지 따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괜스레 자존심이 상해 오른손에 더욱 힘을 준다. 그녀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의 얼굴과 명함을 번갈아 살폈다.


[Bar Origin 대표 나지홍]

"바 오리진 대표?"

"뭐, 보시다시피 딱히 강력계 형사님과 친하게 지낼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증거를 보여드릴 순 없어도 전 납세의무도 꼬박꼬박 준수하는 성실한 주류업자거든요. 이리 보여도 바텐더 쪽에서는 꽤 알아주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알아주시는 바텐더 분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죠?"


휘영은 오른손에 슬그머니 힘을 뺀다. 치밀었던 흥분이 어느정도 가라앉고 냉정이 회복되자 슬그머니 말투도 바꿨다. 일단 이 사람은 생각보다 말수가 많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사건에 대한 조사차원에서 본다면 무척 긍정적인 케이스. 지홍은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거, 되는 대로 막 주워입은 거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만약 수트나 유니폼이었다면 세탁소 비용이라도 청구했을 테지만요. 일단 모로 봐도 근무 중이신 거 같지는 않고…… 아직 휴가 중이신가 보군요. 자~ 그럼 어디부터 설명을 드려야 하나……"

"……나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고, 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눈치군요. 솔직히 좀 불쾌한데요. 뭐 믿음직한 정보통이라도 두고 계신 듯한데."

"아, 무슨 검은 돈이 오가는 커넥션 같은 걸 의심하시는 거라면, 그다지 영양가 있는 방향은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생각하시는 거야 자유지만, 그거랑은 좀 다르거든요. 애초에 이 자리에서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니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

"말이 많이 길어졌네요. 본론은 짧게 말씀 드리죠. 서에 돌아가보시면 알게 되시겠지만…… 이번 사건, 경찰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휘영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명백히 경찰 수사력을 무시하는 발언. 도발일까? 그녀는 지홍을 노려본다. 하지만 보이는 건 확신에 찬 표정. 그녀의 경험상, 어떤 목적을 품고 은근히 떠보려거나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경우에는 저런 표정이 나오기 힘들다. 후우…… 짜증나지만 일단 참자. 이건 사건에 관한 참고인 조사의 일환일 뿐이다. 판단이 서자, 휘영은 적대감을 억누르고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설명하기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니, 그냥 '사고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만 말해두죠.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시다 해도…… 안 될 겁니다. 아마도."

"……굉장히 자신만만하시군요. 그럼 그쪽은 원인을 안다는 뜻?"

"오, 날카로우시네요. 물론입니다. 현장을 직접 둘러본 건 아니라서 예상만 할 뿐이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 원인이 있다고 100% 확신합니다. 음…… 하지만 말씀 드려봐야 큰 의미는 없을 것 같군요. 지금 경위님 표정을 보건대 '어디 한 번 맘대로 씨부려 보시지'라고 생각하시는 게 훤히 보여서…… 나중에 진지하게 들을 준비가 됐을 때 찾아오시죠. 요즘 제가 어떤 인간 때문에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중이라, 했던 말을 또 하기가 그리 내키진 않네요. 그럼 실례."

"……"


지홍은 일부러 신경을 긁으려는 건지, 거친 표현이 섞인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그러고서는 정말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끝낸 뒤 슥 지나쳐 걸어가버린다. 휘영은 당황스럽다. 지금 밀당이라도 하자는 건가?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을 때, 지홍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이 새…… 아니, 이 사람 진짜 뭐지?






"단서가 전혀 없다니, 그게 말이 돼요?"


이튿날, 정영태 팀장이 이끄는 팀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휘영이 출근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온갖 자료를 뒤져대는 바람에 난장판이 펼쳐진 것. 그 폭풍 같은 기세가 자신에게 향했을 때, 영태는 한쪽 손을 이마에 얹은 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녕 얘가 어제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 받던 처자가 맞단 말인가.


"내가 최소 두 그릇이라고만 하고 최대치를 말을 안 해줬구나. 밥을 한 스무 그릇쯤 먹고 왔니?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애가 왜 이렇게 힘이 넘쳐. 기운 차린 건 다행이긴 하다만……"

"아, 팀장님. 말 돌리지 마시고요."

"그래~ 나도 말인지 당나귄지 모르겠다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냐. 이 잡듯이 현장 구석구석 뒤져서 가져온 건 다 분석했는데 폭발 원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이대로는 테러 담당 부서에 넘기기도 애매해서 일단 그냥 계류 중이다."

"저, 이거 그냥 못 넘겨요. 반드시 밝혀낼 겁니다."

"그래그래~ 근데 미안한 말이다만, 가능하면 네 개인시간 쪼개서 해주면 안 되겠냐? 며칠 사이에 일이 좀 많이 밀렸거든. 따로 야근하라고는 안 할 테니 이거나 좀 도와주라."

"걱정 마세요! 최 형사님, 자리 비운 동안 쌓인 건 저한테 다 주세요. 다른 분들도 빨리."

"어? 어어, 그래. 그럼 이것들 좀 부탁할게."


상상 이상으로 의욕이 넘치는 휘영을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최재한 경사는 얼떨결에 들고 있던 서류철 몇 개를 내밀었다. 휘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들을 받아 들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그는 슬그머니 영태에게로 다가갔다.


"멀쩡히 잘 돌아다니는 건 좋긴 한데, 왜 이렇게 꺼림직하죠?"

"너도 그러냐? 저거 혹시 꺼지기 직전에 더 활활 불타는,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불길한 말씀이긴 한데 딱히 부정할 수는 없네요…… 아무래도 당분간 주시해야겠습니다. 우리 은 경위님, 있던 일 가져가준 건 좋은데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주시네. 역시 엘리트시다……"

"미안하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덕을 많이 못 쌓았나 보다…… 어쩌겠냐. 다같이 으쌰으쌰하는 수밖에."






"머지 않아 찾아오실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성격이 꽤 급하시군요."


오픈 준비를 하러 나온 지홍은 가게 입구에 주저앉아 있는 휘영을 발견하고는 말을 건넸다. 꽤 일찍부터 기다렸던 듯 벽에 슬쩍 기대 눈을 감고 있던 휘영은 익숙한 목소리에 튕기듯 일어났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고 가버리시다니. 밀당 실력은 인정해야겠네요. 예의는 좀 더 배우셔야 할 것 같지만."

"음. 시비 걸러 오신건 아닐 테니 앞의 칭찬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예고 없이 들이닥치신 거 치고는 운이 참 좋으시네요. 제가 직접 가게를 열러 나오는 날이 그리 많지는 않거든요. 일단 들어가시죠. 저녁 공기가 꽤 찹니다."


지홍의 가게는 10층 빌딩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훌륭했다.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제법 화려한 네온사인의 향연이 꽤 깊이 있는 야경을 이루고 있었다. 내부는 검은색을 테마로 한 익숙한 모던풍 인테리어. 바(Bar)에는 대략 여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도록 돼 있었고, 홀에는 4인용 테이블 네 개, 창가에는 2인용 테이블 세 개가 늘어서 있다. 전반적으로 테이블을 더 놓을 수도 있어 보였지만, 의도적으로 공간을 많이 둔 듯하다. 지홍은 휘영에게 바 한가운데 자리를 권한 뒤 탄산수 한 잔을 내줬다.


"꽤 알아주는 바텐더 분이시라면서……보통은 칵테일을 주시지 않나요?"

"술 드시러 여기 오신 건 아니잖아요?"


휘영은 기가 찼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하기도 뭣하다. 그 날 만남에서부터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느낌. 언뜻 지홍의 얼굴을보니 무표정에 가깝다. 여유만만한 웃음을 짓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칼자루를 잡았으니 뻗대겠다 이건가……'

"뭐 물어보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설마 진짜 술 드시러 오신 거?"

"아, 아녜요. 그…… 그 뭐냐. 사건의 원인이 뭔지 알고 있다고 하셨죠? 서에 돌아가서 자료를 뒤져보니까 폭발이 왜 일어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어요. 저도 믿을 수가 없어서 직접 현장을 가보기도 했는데 별 성과가 없었고."

"호오…… 굉장히 고분고분해지셨네요."

"네?"

"아뇨, '너 뭐 하는 새끼야!'라고 살기등등하게 외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말이죠. 지금은 뭐랄까, 제가 뭐든 말씀 드리면 냉큼 믿으실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


대놓고 쿡쿡 찌르는 화법. 그래,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라 이 인간 자체가 원래 이런 타입인 게 분명하다. 휘영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느낌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지홍은 피식 웃으며 선반에서 푸른빛이 도는 술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자그마한 토닉워터 몇 병을 꺼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봄베이 사파이어 진으로 만든 진 토닉입니다. 싸구려 취급을 받는 주종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향이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열을 식히고 싶을 때 종종 마시곤 하죠."

"술 안 주신다면서요?"

"사실을 왜곡하시면 곤란합니다. 술 드시러 오신 건 아니지 않냐고 물었지, 안 드린다고 한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


한 마디도 안 진다. 주도권을 뺏긴 것도 억울한데 얄밉기까지 하다. 이젠 답이 없다고 생각하며, 휘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 정도 도발에 걸려들다니, 그간 쌓아온 경찰로서의 커리어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지홍은 양팔을 포개 바 위에 걸친 자세로 서서 휘영을 똑바로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만. 말싸움 좀 밀렸다고 의기소침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한 말싸움하는 편이거든요. 보아하니 이 사건에 무척 절박하게 매달리고 계신 것 같으니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죠. 음……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술이 더 필요해지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될 거라고 장담하죠."

"……?"

"제가 매일같이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너무 판타지스러운 일이라서요. 믿기 힘드실 테지만 엄연한 현실이니 재주껏 믿어보시길. 그 과정에서 술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시고요. 돈은 안 받을 테니까."

"네? 그게 무슨……"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지홍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왜 경찰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지. 그 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은 지홍이 묘사한 것처럼 정말 '판타지스러운' 스토리였다.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https://brunch.co.kr/magazine/24jh-nove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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