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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 더욱 더 '심플'해지기

잘 비워내지 못하는, 오래된 습관에 관하여

by 이글로

정리. 버림. 비움. 단순함.

요즘 부쩍 더 이끌리게 되는 단어들이다.


최근 공간 정리와 재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여럿 보게 됐다. 매체 기사, 책과 서평, 블로거들의 개인적인 글까지. 저마다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다양한 글들이지만, 주제만큼은 명확하다. 하나같이 '심플Simple함에 대한 예찬'.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천하고 있진 못하지만.



나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뭔가 많다. 수시로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도, 마음 속에 이는 감정도, 그로 인해 털어내지 못하고 쌓아둔 미련도 많다. 무엇보다도, 소심함으로 인해 담아두기만 한 말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면서도 또, 잘 버리지 못한다. 어느 날 스쳐가려던 생각 한 토막을 꼭 붙잡고 어딘가에 적어둬야 직성이 풀린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는 모른다.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어디에 적었는지를 잊을 것이다. 메모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때도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메모를 발견하고는, '이걸 왜 적었더라?'하며 갸웃거린다. 어디에서 보고 옮겼노라고 출처는 적어두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까마득하다. 맥락을 잃은 메모는 의미도 함께 잃는다. 그러면서도 지우지는 않는다. 또, '메모질' 역시 멈추지 않는다.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생활 환경에서도 나타난다. 철 지난 옷들을 담아뒀던 박스를 열어본다. 잘 안 입게 되면서도 왠지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한 빛바랜 옷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여 나온다. 이젠 좀 버려야지 싶다가도 '에이, 혹시 모르지.'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접어 넣는다. 꼴에 나름대로 곱게 개어 놓는다. 이러니 이사 한 번 할 때마다 박스가 자가증식을 거듭할 수밖에……



'많음'과 '버리지 못함'. 이 애물단지 같은 속성은 글을 쓸 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가지 생각을 다음 생각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마땅한 문장을 찾지 못하면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는다.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런데, 눈 앞의 화면 위에 쓸만한 건 딱히 없다. 시간은 계속 가고, 집중력은 계속 흩어지기만 한다. 초조함에 점점 빠져든다.


조바심에 사로잡히면 분별력이 희미해진다. 괜찮다 싶은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적는다. 그 순간, 쓰고자 했던 방향에 맞는 건지에 대한 고민은 사치다. 완성한 뒤의 만족감은 일단 고려하지 않는다. '일단 쓰고 나중에 고치자'고 스스로 되뇌며 꿋꿋이 거친 문장들을 적어 내려간다.


시간에 쫓겨 쓴 글을 나중에 다시 본다. 당연히 버릴 것 투성이다. 같은 의미의 반복, 원 주제에서 벗어난 소재들이 종종 눈에 띈다. '버리는 단계를 실패한 글'에는 애정이 식는다. 잘 버리지 못하는 성질머리와 싸워가며 겨우겨우 일부를 덜어낸다. 공개된 뒤에도 미련이 남아 계속 살핀다. 뒤늦게 빼고 더하고 다듬어본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쌓아두는 게 그리 나쁘기만 한 습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쌓아둔 것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 삶의 걸음걸음마다 남겨진 수많은 흔적들을 그냥 쌓아둔 채로 버려두는 바로 그 순간, 쌓아두는 것 자체는 나쁜 습관이 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은 잘 다듬어 깔끔하게 보관하는 일은 평생 유지해야 할 습관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릴지 보관할지 한 번 결정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다음번 분류를 행할 때까지는. 여기까지 오면 그것은, 습관이 아닌 용기가 된다.



'버리지 못하는 나'는 분명 문제다. 스스로 고쳐야 할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는 해냈다. 인지한 그 순간부터 시작된 본 게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꽤 오랫동안 쌓여온 것이니, 이젠 보다 본질적인 문제와 싸워야 할 때다.


이젠 습관을 떨쳐내려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적어도 나 하나 던 살림을 옮기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어야 하잖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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