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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꼰대'를 만났다

딱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꼰대 느낌이 오더라

by 이글로

여느 때처럼 무더운 저녁. 오랜만에 전 회사의 입사동기를 만나 밥을 먹었다. 운동 삼아 자기 집까지 같이 걸어가면 차로 태워다 주겠단다. 그게 무슨 짓인가, 싶긴 했지만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걸으면서 이야기도 좀 하고 그러면 좋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다.


선릉역에서 출발해 대치역과 개포동역 사이 즈음에 있는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길. 도중에 동기는 휴대폰이 이상하다며 올레 대리점에 잠시 들렀다 가자고 했다. 나쁠 것 없었다. 나야 에어컨 쐬며 놀고 있으면 될 테니까.



직원 두 명이 근무하는 작은 대리점. 한 직원이 동기의 휴대폰을 살펴보는 동안 슬쩍 가게를 둘러봤다. 기가 와이파이 체험 기기가 있길래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는데, 웬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어디서 맛난 것좀 거하게 잡수셨는지 이쑤시개로 어금니를 쿡쿡 쑤시면서.


"밖에 있는 저 오리 선풍기는 얼마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심심했던 터라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뭔가 해서 봤더니 가게 입구에 오리모양 선풍기가 담긴 박스(실제 상품이 들어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가 쌓여있었다.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타입인 듯한데, 척 봐도 사은품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한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따로 판매하는 건 아니고요. 약정 가입하신 분들께 선물로 드리는 거예요."


그럼 그렇지. 휴대폰 대리점이 무슨 하이마트도 아니고 휴대용 선풍기를 팔 이유가 없지 않나.


"아, 그럼 그냥 하나 좀 줘봐. 우리 손자가 좋아할 거 같아서 갖다 주려고 그러는데."

"아하하, 그러시구나. 그런데요 고객님, 죄송하지만 약정 가입하신 분들께만 드리는 거라서요."

"그럼 내가 올해 안에 KT로 갈아탈게. 지금 저거만 하나 줘봐. 응? 안 그래도 전화기 바꿀 때 됐으니까. 약속한다니까?"

"죄송해요. 수량이 딱 정해져서 나온 거라 본사에 바로 가입내역을 보내게 돼 있어서요."


대충 그 정도까지만 듣다가 시들해졌다. 어느 업소에나 흔히 있을 법한 진상 고객과의 대화. 아니, 이건 진상 축에도 못 끼겠지. 계속 뭔가 실랑이를 벌이는 걸 대강 듣고 있는데, 문득 할아버지가 퉤퉤- 하며 바닥에 뭔가를 뱉는 시늉을 한다. 이쑤시개로 청소를 하셨으니 그 결과물(?)을 뱉는 거겠지. 근데 남의 가게 안에다? 나도 모르게 직원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눈에 보이는 뭔가가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눈꼬리가 가늘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 까다로운 상황도 아니었고, 통신사 대리점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에게도 흔히 듣던 종류의 에피소드다. 안 될 걸 알고서도 그냥 물어나 보자 싶은, 손자사랑이 각별한 어느 할아버지의 사연으로 포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 그 한 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에잉, 거 KT 사장이 누구여?
어른이 달라 그러면 그냥 네~ 하고 줄 것이지…



채 3초도 걸리지 않은 단 한 마디. 그 위력은 상당했다. '손자를 너무도 사랑하는 인자한 할아버지'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꼰대'로 뒤바꿔놨으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저런 뻔하디 뻔한 대사를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2016년, 안 그래도 더워서 짜증이 스멀스멀 치미는 저녁에.


변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꼰대'라는 단어를 별로 쓰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의 일부 단면만을 보고 부정적인 딱지를 붙이고 싶지 않아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꼰대 같은 모습으로 비칠 때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편견이 아니도록 만드는 마법 같은 주문(?)들이 있다. 바로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내뱉은 저 대사가 그중 하나다. 나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상황에서 어른을 들먹인다면 다른 곳에서인들 안 그럴까? 남의 영업장에 '자기 이 쑤신 결과물'을 푸푸 뱉어대는 행패는 둘째 치고서라도.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언젠가 '어른'이라는 의미에 대해 적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누구나 태어난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된 것으로 인정받지만, 그게 참된 의미의 어른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대략 그런 취지의 글이었다.


켜켜이 쌓인 세월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 그로부터 나오는 통찰과 지혜는 분명 존중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쌓인 세월의 무게를 마치 권력인 것처럼 휘두르고자 한다면 그 안에 담긴 통찰과 지혜가 얼마나 의미를 갖게 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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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그렇게 마구 휘둘러대면 통찰과 지혜가 남아나기는 할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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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dicam 2016-08-13 01-54-26-405-vert.jpg 네이버웹툰 가스파드作 <전자오락수호대> STAGE 5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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