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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찾지 않아도 됐었다

'사람냄새 나는 좋은 세상'은 이미 내 주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by 이글로

잠원동으로 이사한 것도 어느새 반년을 훌쩍 넘었다. 주로 동네 상권 위주의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젠 꽤나 익숙해졌다. 어떤 생필품은 어디서 찾으면 되는지, 야채와 고기는 각각 어느 가게가 좋은지, 가끔 과자를 먹고 싶을 땐 어디로 가는 게 좋은지 등등.


꼰대를 만나고 왔던 그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토요일 밤이었다. 심야의 센티멘탈을 못 이겨 종이 위에 몇 글자를 끄적이다가, 문득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어 편의점을 찾았다. 반백의 머리를 한 주인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괜스레 멋쩍어진다.


콜드 브루 두 병을 들고 계산대에 섰다. 카드를 내밀자 주인아저씨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가벼운 인사말을 건넨다.


"아휴, 날씨가 엄청나게 덥습니다. 그렇죠?"


살짝 당황했다. 이런 식의 인사를 건네는 가게가 처음인 건 아니다. 그저 몇 년 간의 서울생활 동안에는 별로 본 적이 없어서일 뿐이다. 대부분 형식적으로 웃으며 목례를 주고받는 정도였지, 감정 담긴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일은 드물었다.


난 그다지 예의 바른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싸가지를 밥반찬으로 주워 먹은 타입도 아니다. 최소 몇 년 전부터는 '친절하게 건네 오는 인사에 까칠하게 반응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는 지키며 살아왔다고 믿는다.


"뜨겁다기보다는 습도 때문에 힘드네요. 낮에는 정말 어디 나다니기도 힘들어요."

"그렇습니다. 예보에 없던 소나기도 자주 오고요."

"기상청이 한동안 잘 맞추나 싶었는데… 요즘 또 일 안 하나 봐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아, 이거 요즘 많이들 찾으시던데 맛이 좋은가요?"

"저도 오늘 처음 사 보는 거라서요. 주위에서 평은 좋더라고요."

"병 디자인이 참 깔끔하게 잘 나온 것 같습니다. 드셔 보시고 나중에 소감 좀 말씀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 나를 향해, 주인아저씨는 "더운데 건강 조심하시고 주말 잘 보내십시오."라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하고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편의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길. 꿉꿉한 날씨였지만 왠지 살짝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 동네에 이사와 처음 편의점에 갔을 때부터 저분은 한결같이 정중한 인사를 건네시곤 했었다. 그걸 새삼 이제야 인지하게 됐을 뿐. 십중팔구 나 아닌 다른 손님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네실 게 분명하다.






본래 서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장소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천성 때문일 수도 있고, '서울에는 삭막함이 만연해있다'는 편견 때문일 수도 있다. 뭐, 요즘은 서울 아닌 전국 어느 도시를 가나 '케바케Case by case' 같긴 하지만.


어쩌면 애초에 그리 오래 살 동네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먼저 마음을 닫고 살았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그들에게 삭막하다는 수식어를 쓸 자격은 없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만년필을 잡을 때까지도,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건 아마도 '사람냄새'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타인이 먼저 피워낸 사람냄새를 내가 받아들였기에, 한층 더 오래 향기를 자아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 길지 않은 서울 생활이지만, 그동안 동네에서 삭막함 대신 편안하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얼마나 있었나 생각해본다.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그간 내가 서울에 정을 붙이지 못했던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어쩌면 내 주위에 이미 있었던 수많은 사람냄새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일지도.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시원한 콜드 브루 한 모금을 머금으며 혼자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본다.


'좋은 세상'은 그리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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