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로만 가득했던 시간, 기적적으로 벗어던지다.
하... 이 새끼, 또 이러고 있네.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소주병. 얼추 봐도 너댓 병은 족히 마신 듯하다. 안주로 먹다 만 듯한 번데기 조림. 주량을 한참 넘긴 과음과 그리 적절하지 못한 안주가 만들어낸 콤비네이션. 썩 유쾌하지 못한 그 무언가가 이불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처박히듯 웅크린 채 정신을 놓고 있는 웬수 같은 새... 아니, 녀석.
대체 이 새, 아니 녀석은 뭐가 문제인 걸까? 이유라도 알면 좀 덜 답답하지 싶은데, 당최 알 수가 없다. 오늘만 해도 대낮부터 그랬다. 제법 쨍쨍한 날씨였건만,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는 먹구름 낀 하늘마냥, 하루종일 우그린 표정을 하고 있더니 기어이 이 꼴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는 거다. 툭하면 방 안에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치우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마 이 자식은 지가 술김에 정리했다고 생각하겠지. 그것도 아니면 우렁각시 꿈을 꾸고 있거나. 에휴, 이런 병신짓을 일삼는 놈한테 올 우렁각시는 없을 거 같긴 하지만.
익숙한 레퍼토리지만, 오늘 수준의 난장판은 다소 이례적이다. 매일 이 모양이었으면 이미 내 손으로 저 웬수놈을 패죽였겠지... 정말이지 마시려면 누구랑 같이 마시든지, 하다못해 안주거리라도 잘 챙겨먹든지. 혼자서 불 다 꺼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궁상질이다. 나 참... 미친 짓도 이만하면 꽤나 수준급이다.
이놈의 내면세계엔 때와 장소 따위 가리지 않는 '기분' 그래프가 있는 게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런 그래프. 플러스 지점에 있을 땐 함께 게임도 하러 다니고 당구도 치러 다닌다. 지극히 평범하다. 본래 지방 출신에다가 '방콕'을 주로 즐기던 놈이라 이따금씩 데리고 서울 구경도 다녔었다. 그땐 좋다. 4차원을 넘나드는 엉뚱함은 제법 봐줄만하다. 그러다가 그놈의 그래프가 y축 경계지점을 넘어 땅 속으로 파고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이 증상이 시작된다. 이러다 미친놈 연구일지도 쓸 기세다.
세상이 온통 회색처럼 보인다 했다. 아무런 의욕도, 아무런 즐거움도 찾을 수가 없다 했다. 이렇게 재밌는 것들 투성인데, 속세에 해탈한 도인마냥 심드렁하다. 그럴 때면 극도의 게으름 모드에 들어간다. 모든 게 귀찮다며 지극히 단조로운 생활 패턴을 그린다. 가끔씩 벌여놓는 이런 개같은 판이 그 울적함의 끝판 버전이다.
뒷처리를 하다보면 화도 난다. 당연하지, 나도 사람인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새벽 취객 상대하다가 들어왔는데, 이러고 나자빠져있는 친구놈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을리가 있나. 그런데 신기한 건, 이 유별난 녀석이 자꾸 신경쓰인다는 거다. 자기만의 세상에 살도록 내버려두면 그만일 텐데, 아무리 외면하려해도 그럴 수 없는 기분. 거 참, 이 놈만큼 나도 이상한 놈이 되어가는 건가?
몇 달 정도 지났을까. 여전히 이 놈은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술을 사오고, 어김없이 어느 시점이 되면 정신줄을 놓는다. 하... 참... 별 게 다 꾸준한 새끼일세. 기왕 꾸준할 거 규칙적이기라도 하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텐데 말이지.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누구나 말하기 껄끄러운 사연은 있는 거니까. 그저 익히 찾아오는 괴로운 심정을 해소하는 방법이 좀 거칠고 서툴 뿐이라 생각했었다. 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긴 하지만 사실 놔두면 제 풀에 알아서 치울지도 모를 일이다. 내 정신이 사나워서 그냥 두고보지 못할 뿐.
군대를 다녀오고, 이 미친놈이 드디어 변했다. 눈에 띄게 밝아졌다. '기분' 그래프가 플러스에 있는 날이 많아지더니, 술병 나발을 부는 횟수가 확 줄었다. 남들은 멀쩡하다가도 어두워져서 나오곤 하는 곳이 군대인데, 반대로 광명을 찾고 나왔다. 역시 여러 모로 신기한 자식이다.
어느덧 몇 년이 지나버렸다. 이 정신 사나운 색히와 그동안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내 자신에게 경의를! '꽐라'가 되는 횟수가 확확 줄더니, 요즘은 술 마시는 양 자체를 줄였다. 지난 날을 반성해서 그런 건지, 늘어가는 뱃살에 위기를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현상이다. 기왕이면 전자였으면 좋겠지만... (나 개고생한 것좀 알아달라고, 이 새퀴야!)
그 시절에 대체 왜 그랬었는지, 어떻게 군대에서 그걸 극복하고 나온 건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 얘기해준 거 같기도 한데,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멀쩡해진(것 같은) 지금이니까.
여전히 이 놈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끝까지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제 길을 고집하며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거다. 이젠 제 미쳤던 시절(?)까지 적당히 활용하는 여유와 교활함까지 보여가면서.
다행이다. 제 길 잘 찾아가줘서. 다행이다. 그때 내가 이 놈을 놓아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친구라는 귀한 이름을 나눠쓸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