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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드니 그 곳에 하늘이 있었다

땅보다는 하늘을 보며 걷는 사람이고 싶다.

by 이글로

군 시절, 내가 제일 힘들어했던 걸 꼽으라면 행군이었다. 당시 내성발톱이 심해 걷기 힘들다며 최대한 불쌍하게(?) 어필하곤 했지만, 사실은 체력과 지구력이 저질이었기 때문이 더 크다. (구차하게 핑계를 대자면, 나만 그랬던 건 아닐 거다. 행군을 즐기는(?) 초인들은 그리 흔한 족속은 아니라고 믿으니까.)


물론, 내성발톱이라고 행군을 빼주는 건 아니다. 활동화(군에서 보급되는 운동화) 신고 걸으라는 친절한 처방(?)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 군 생활 내내 행군을 한 건 몇 번 안 되지만, 양말에 피딱지가 말라붙는 한이 있어도 중도에 낙오하지 않았던 건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막막함도 만만치 않은 고난이다. 그래서 나는 대개 땅을 보며 걸었다. 멍하니 앞사람의 뒤꿈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다보면 소위 말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을 경험할 때도 있었다. 당최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수십 km의 밤길을 걸으며 다짐했었다. 이 곳을 벗어나면 다시는 땅을 보며 걷지는 않겠다고.


지금이야 이런 장면 보며 낄낄대고 있지만, 그땐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from。<진짜사나이> 레전드 중 한 명, 헨리)


수 년이 지난 지금, 난 그 다짐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아왔다. 땅을 보며 걷는 시간이 무척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에 든 스마트폰을 보느라 그런 거지만.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던 작년 생일. 언제부턴가 목의 뻐근함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급히 병원을 가봤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의사 선생님.



일자목이 좀 있으시네요.



아니, 잠깐만요. 선생님? 그게 그렇게 시크하게 꺼내도 되는 대사인가요? …… 그렇단다. 일자목이나 거북목은 요즘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목 통증으로 방문하는 환자의 생활패턴을 살펴보면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 때문이라고도 하셨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볼 때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게 마련이고, 그러면 목뼈는 머리 무게를 고스란히 지탱하며 버텨야 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어서 그런지(?) 처음에야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초고강도 노동이 반복되고 그 피로가 누적되면 목뼈의 경고시위가 시작된다. 내가 바로 그 단계.



병원에 다녀온 이후, 요즘은 의식적으로 길을 걸을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 그것조차 습관이 돼 버려서 잘 안 되면 아예 가방에 넣어버린다. 그럼 꺼내기 귀찮아서 안 보게 되니까. (다른 손에 아x패드를 들고 나왔는데 가방엔 스마트폰만 넣었다면 낭패… from。경험담)


'뒷목잡기' 스킬은 중년 + 혈압 테크트리의 주된 결과로 묘사됐었지만, 이젠 아닐 거 같다.


간만에 일찍 일어났던 일요일. 침대에서 마냥 뒹굴기가 아까워 강남 교보문고로 향했다. 강남대로를 따라 주욱 걷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코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꼭꼭 갈무리하고, 이어폰 속 노래에만 의지해 거리를 걸어본다. 지겹도록 봤던 풍경이지만, 괜히 새로워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기분 탓일 가능성이 크지만.


책 한 권을 사들고 돌아오는 길. 꽤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서울에서 이런 하늘을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분명 꽤 여러 번 있었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대개 '땅을 쳐다보고' 있었을 게다.


'가을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겨울인가' 싶게 야속한 날씨지만, 하늘만큼은 높디높은 가을 본연의 색이다. 정말이지 스마트폰을 넣어두길 잘했다 싶은 날. 정오를 향해가는 대낮이었지만, 잠시 새벽 같은 감성에 젖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길 한가운데 멍하니 선 채로.



아마 살다보면 또, 땅을 보며 걷지 않겠다던 다짐을 깰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고 그 때의 다짐을 다시 떠올리는 날, 문득 고개를 들면 그 날의 하늘이 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닌 언제라도. 그리고 그 중에는 오늘처럼 진득한 감상을 흩뿌리는 하늘이 또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너무 깨끗해서 이게 정녕 하늘 사진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from。2016년 10월 30일 논현역 3번 출구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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