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또 한 번 반복한다
저는,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정말 가끔, 황송하게도 '당치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지인들도 있다. 몇 년의 회사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지각한 적 없고, 약속을 하면 결코 상대방보다 늦게 나오는 법이 없으며, 주어진 기한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키고 본다는 등… 그게 부지런한 게 아니면 대체 무엇을 부지런하다고 해야 하냐며 추켜세워주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참 복도 많은 듯. 그리고 사실 약속에 늦은 적은 꽤 있……) 당연한 것들이 왜 부지런함의 근거가 돼 버린 건지, 듣다보면 좀 민망해진다는 건 함정.
쓰다 보니 셀프 자랑질, 셀프 잘난 척이 됐지만, 난 떳떳하다. 실제로 들어본 말들이니까. 다만
죄송하게도, 그 분들은 모두 나에게 속으셨다. 나를 좀 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 대략 이런 반응을 보인다.
'부지런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완전 게으르지. '귀차니즘' 대마왕 정도?
비교적 짧은 기간을 알고 지낸 사람들이 나를 부지런하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매일 달라지는 생활패턴에 맞춰 생각하고 움직이는 걸 극도로 귀찮아하는 본성 때문이다.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면 여러 모로 편하기 때문에, 아예 거기에 맞게 생활패턴을 고정시켜버리는 것. 반복성 일정들에 약간의 여유 시간을 끼워넣어두면 어지간한 변수는 대충 커버가 된다.
내게 주어진 하루를 계획적으로 보내는 것조차 귀찮다고 여기는 극도의 게으름 때문에, 오히려 꽤나 규칙적인 라이프 사이클을 갖게 됐다. 이건 정말 몇 번을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척 봐도 '얻어 걸린' 느낌이랄까.
뭐, 대충 이 정도 수준의 게으름과 귀차니즘을 패시브Passive로 타고난 덕분에, 한동안 글쓰기도 뜸했다. (게으름을 피운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갑자기 백지공포증이 찾아왔다는 둥, 내가 쓴 글이 부끄럽게 느껴졌다는 둥, 여러 이유를 갖다 붙이긴 했지만… 그 모든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게으름이다.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쓴 것도 거의 몇 주 정도 된 것 같고, 그동안은 새로 나온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확장팩이나 플레이 하고, 낮잠/밤잠 늘어지게 자면서 무척 나태하게 보냈다. 그나마 하루 걸러 한 번씩 운동을 다니는 게 스스로 무척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생각없이 노는 것도 슬슬 좀이 쑤신다. 여전히 타고난 '게으름 유전자'는 더 누워있으라고, 그래도 된다고 달콤하게 부추기긴 하지만… 어디 숨어있었는지 모를 양심이라는 녀석이 활동을 시작해버린 탓에 마냥 놀기만 하기엔 좀 껄끄러워졌다.
간만에 피드를 살피며 구독을 눌러놓은 다른 작가분들의 글을 읽어본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도 있고, 어쩌면 저렇게 성실하게 사는지 감탄을 자아내는 분들도 있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촉촉한 감성을 자랑하는 분들도 차고 넘치게 많다.
그 모든 분들은, 어찌 보면 '작가'라는 영역에서의 내 경쟁자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계속 작가라는 길을 걷는 한, 앞으로도 무수히 마주칠 고민과 번뇌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이들은 결국 그 분들일 것이다.
누군가와 경쟁하는 걸 힘들고 귀찮아 하는, 그래서 경쟁보다 협력이 주가 되는 세상에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게으름뱅이. 느릿느릿, 띄엄띄엄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1년 넘게 머무르고 있는 이 '브런치'라는 공간이 정겨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창밖에 비가 쏟아진다.
이 비가 그치면 아마도 완연한 가을 날씨가 찾아오지 싶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운동 마치고 돌아와 대충 끄적이고 있는 이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본격적인 가을맞이 준비를 해야하리라. 뭐 말만 거창하지 사실 별로 할 건 없지만.
한 해에도 몇 번씩 반복하는 '다시 힘을 내자'는 다짐. 정확히 헤아려본 적은 없으니 모르겠지만, 오늘로 한 백아흔 몇 번쯤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같은 다짐을 또 한 번 반복하며,
내려둔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