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의 '화난 말투'를 그리워하며
한 친구 이야기를 할까 해요.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깝게 지냈던 친구죠.
음… 제가 기억하는 그 친구는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모습이었어요. 실제로 나긋하게 말을 걸어도 퉁명스레 대꾸하기 일쑤였고, 별 의미없는 우스갯소리에도 느닷없이 벌컥 성을 내곤 했었죠.
툭하면 화를 내고, 어디서 배웠는지 듣기 거북할 지경인 욕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친구. 아마 지금 나이에 만났더라도 대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하물며 멋모르던 나이, 한창 감수성 예민했던 나이에는 오죽했을까요.
모두가 대하기 어려워했기 때문인지, 그 친구는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어요. 같은 동네에 살았던 다른 친구 몇이 있었지만, 등하교길 방향이 같으니 함께 가는 듯한 모습일 뿐, 함께 어울려 논다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죠.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 이쯤 이야기하면 다들 비슷한 걸 궁금해하죠. 실제로 입밖으로 꺼내 묻는 사람도 있고요.
너는 왜 그런 친구와 계속 어울려 다녔어?
이 글을 보는 여러분도 같은 의문을 가지셨나요? 그렇다면 응당 답을 해드려야 할 텐데…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버려서 기억이 나질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 처음부터 그 친구에 대해 싫다는 마음이 없었는지도 헷갈리거든요. 다만 한 가지 떠오르는 건, 뭔가를 물어보면 퉁명스러운 말투로 성실하게(?) 대답하는 친구의 모습이었어요.
제 기억이 뭔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그 친구는 뭐랄까… '화내지 않고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고 할까요? 아니면 '부드럽게 말하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아무튼 대략 그런 느낌이었어요. 하하, 역시 좀 이상한가요…?
툭툭 내뱉는 말투도, 습관처럼 섞이던 욕설도, 적어도 저한테는 듣기에 거슬렸던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혹시 또 모르죠. 어쩌면 계속 듣다보니 적응돼 버려서 그런 걸지도.
그렇게 몇 년을 알고 지냈을까… 나이를 먹고 고향을 떠나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니 그 친구와도 만날 일이 뜸해지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술을 잔뜩 마셔 거나하게 취해버린 날이었어요. 술을 좀 깰겸 동네 공원에 앉아 쉬고 있는데 그 친구가 역시 술에 잔뜩 취한 모습으로 찾아왔어요.
그는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정겹기까지 한 '화난 말투'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옛날 이야기부터 요즘 살고 있는 이야기까지. 저 역시 할 말은 있었지만, 그 친구가 오늘따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아보여 적당히 맞장구만 치면서 그냥 들어주고 있었죠.
생각해보니 그 날 그 모습을 모르는 누군가가 봤다면… 제가 뭔가 큰 잘못을 해서 혼나고(?) 있는 줄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네요.
한참동안 화를 내던 친구는 어느덧 제 풀에 지쳤는지 말을 멈췄어요. 뭐라 말을 해줘야할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까? 잠깐 고민하다보니 술이 좀 깨더군요. 잠깐의 침묵 동안 힘이 좀 돌아왔는지, 친구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어요.
'고맙다'더군요.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이런 말투를 갖고는 살기가 벅차다는 걸 요즘 매일 느낀다고. 그런데 하도 오래된 습관 같은 게 돼 버려서 이젠 알아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의식적으로 말투를 바꾸며 보내다 보니 참 피곤했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네요.
계속 대꾸없이 듣고 있었더니, 퉁명스러운 인사말을 남기고 천천히 멀어져가네요. 이제 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지만, 마치 당장 내일 또 볼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이죠.
그 날 이후로, 오늘까지 그 친구를 또 만난 적은 없었어요. 사회생활 하면서 만난 수많은 지인들처럼, 가끔 생각날 때마다 형식적인 인사만 주고받고 있네요.
이따금씩 그 친구의 화난 목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어요. 마음에 안 드는 걸 거침없이 말해버리는 그 솔직함이 말이죠. 자칫하면 당장이라도 싸움이 날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은 있었지만요. 이번 주말에는… 술 한 잔 걸친 뒤에 제 기억 속 'Angry Man'을 불러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