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절전'이 필요해요.
"여기, 보이시죠? 아래쪽 사랑니 두 개가 양쪽 다 누워있어요. 위쪽은 괜찮은데 아래쪽은……"
말끝을 흐리는 의사 선생님의 어조가 묘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다음에 이어질 말은 왜 진작 빼지 않았냐, 지금이라도 얼른 빼는 게 좋다, 뭐 이런 말씀이겠죠? 그럼 저는 또 "아직은 괜찮아서요."라고 손사래 치고 말거고요. 몇 번 겪어봐서 익숙한 패턴입니다.
"혹시 피곤하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아래턱이 얼얼하고 편두통이 오지 않으세요?"
"음… 네, 그런 편이긴 한데요. 그게 이거랑 상관이 있나요?"
"사랑니가 누워있는 데다가 뿌리가… 턱 쪽 신경에 닿아있어요. 몸이 피로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잇몸이 붓거나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사랑니 뿌리가 신경을 누를 수도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이거, 무심코 빼다간 큰일 치를 수도 있겠네요."
"……"
(*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제 기억에 남아있는 대략적인 핵심 내용만 가지고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아무래도 전문지식의 영역이다 보니…)
뭔가 놀림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니, 이런 상황이면 대놓고 겁주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니는 빼는 게 좋다.'라든가 '관리만 잘하면 굳이 빼지 않아도 된다."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봤습니다. '난 사랑니 안 났는데.'라는 얄미운 깐족거림도 가끔 듣곤 했죠. 하지만 이런 소견은… 참신하더군요.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묘하게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 탓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 심할 때는 한 달 중 거의 반 정도를 구내염이나 설염 두세 개씩 달고 삽니다. 또, 잦으면 2주에 한 번, 뜸하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잇몸을 꽈-악 조여오는 듯한 통증이나 오른쪽 머리 한 켠을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편두통이 찾아오곤 했죠. (이 정도면 거의 패시브급 디버프)
그런 날이면 저녁밥도 거른 채 이른 초저녁부터 까무러친 듯 잠들곤 했습니다. 그나마도 아파서 깼다가 또 잠들었다가 하면서 말이죠.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체력적인 문제로, 백수 시절에는 정신적인 문제로 거르지 않고 겪던 정기행사(?)였습니다.
구내염, 설염, 치통, 편두통 등을 한두 번이라도 겪어본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와… 그러고 어떻게 사냐"라고 경악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건 참 대단합니다. 이런 꼬라지를 하고서도 살긴 살거든요. 그것도 술 먹을 거 다 먹어가며, 놀 거 다 놀아가며, 컨디션 괜찮을 때는 운동도 해가며 말이죠.
… 물론 그 덕분에 쉬는 날에는 체력 보충을 핑계로 침대에서 붙박이처럼 안 움직이며 인생낭비(?)를 즐길 때가 많았지만요.
지난 추석 연휴에 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해 2박3일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마지막날 쇼핑이라도 하고 들어가자며 부여 롯데아울렛에 들렀죠. 쇼핑은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만, 문제는 그 날 컨디션이 상당히 저조했다는 겁니다. 단골을 넘어 단짝과도 같은 입속 염증은 다행히 없었지만, 차에서 잠을 잘못 잤는지 가벼운 두통을 겪고 있었죠.
그래서 몇 군데 매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시큰둥한 표정이었고, 가족들이 옷을 고르고 입어보고 하는 동안 저는 매장 안 의자에 앉아 멍 때리고 있었습니다. 신이 나서 옷을 고르던 형이 그제야 저를 발견(?)하고 "왜 이렇게 저기압이냐"고 묻더군요.
미미하긴 했지만 아픈 건 아픈 거라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버지 환갑 기념 여행, 그것도 내내 잘 놀고 마지막 일정인데 짜증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그때 퍼뜩 '절전모드'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절전모드 중이야."
"뭐? 그게 뭔데?"
"있어, 그런 게."
갑자기 떠오른 말이라 설명하기도 귀찮고 해서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더 물어보면 짜증이 새어나올 것 같았는데, 다행히 옷 구경에 신이 났는지 더 묻지 않더군요. 그 뒤로 쇼핑을 얼마나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색 디스커버리 바람막이 하나를 획득(?)했더라고요. (개이득…)
그 뒤로 약 한 달, '절전모드'라는 말을 되뇌며 살았습니다. 그간 거짓말처럼 단짝 같은 고질적 증상들이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죠. 구내염과 설염은 연휴 이후로 한 번도 생긴 적이 없고, 편두통은 지난 주에 한 번 오셨지만 반나절 정도 머물다가 타이레놀 두 알에 치명타를 맞고 일찌감치 가셨습니다.
편두통이 가신 그 날부터, '인간의 절전모드'에 대해 정리를 해봤습니다. 뭐, 특별한 비법 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평소보다 말수를 줄이고, 목소리 톤을 의식적으로 낮춰서 내는 정도죠. 거기에 덧붙여 생활 패턴은 가급적 '바른생활 사나이'에 가깝게 유지하는 중인데, 처음에는 고생 좀 했지만 이젠 그럭저럭 적응해가는 중입니다.
몇 달 전부터 새로 일을 시작한 회사의 대표님은 '맡은 일만 제때 해놓으면 지각을 하든 칼퇴를 하든 상관없다'는 주의. (실제로 저보다 늦게 출근하시고 일찍 퇴근하시는 날이 대부분) 덕분에 체력적인 고비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확 줄었습니다. 여기에 자칭 '절전모드'가 무르익어가면서, 요즘은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짧으면 두어 달 정도, 길면 몇 달 더, 셀프 임상실험(?)을 지속해볼 예정입니다. 그 사이에 '절전모드'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한두 가지쯤 더 추가될지도 모를 일이죠. 그때가 되면 그걸 가지고 주위의 '예민한 친구들'에게 적극 전파해볼 생각입니다. '절전모드'. 우연한 기회에 대충 떠올린 거 치고는 참 적절한 네이밍 아닐까 싶네요.
… 아!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 딱 한 분에게 이미 전파했습니다만… 어차피 그 분은 이 글을 못볼 가능성이 매우, 무척, Vㅔ리 높으니 그냥 쉿- 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보더라도 아마, 자기 이야긴 줄 모를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