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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 반가웠어요, 그대

작지만 특별한 기억 하나로 남을 수 있기를…

by 이글로

밤 10시. 날씨가 꽤 추웠습니다. 겁도 없이 반팔 티셔츠 위에 바람막이 하나만 걸치고 나온 터라 한층 더 실감이 났죠.


추위로 인해 살짝 곤두선 신경을 추스르며 강남대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지오다노를 지나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 끄트머리에 '그'가 앉아 있었습니다.


"세계 여행 중. 핸드메이드. 돈은 주고 싶은 만큼 주세요."


거기까지는 그냥 그랬습니다. 척 봐도 외국인인 듯한데, 또박또박 한글로 적힌 글귀에 '어라?' 하고 잠시 호기심이 갔을 뿐이죠. 뭔가 크게 걸렸던 건… 그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밥 먹고 싶어요.



날씨에 서두르던 걸음을 멈칫하게 만든 한 마디. 잠시 멈칫했을 뿐, 곧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별 거 아닐 수 있는 말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몇 걸음 더 걷는 내내 자꾸 그 말이 마음에 밟히더군요.


때때로 그 '별 거 아닌 것'이 많은 것을 바꿔놓곤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밥 먹고 싶다'는 문장을 혼잣말로 읊다보니 순간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입고 있던 바람막이의 지퍼를 슬쩍 내렸습니다. 찬바람이 쌩 파고드는 와중에 목걸이 지갑을 열어보니 들어있는 건 교통카드와 달랑 천 원짜리 네 장뿐. 잠시 생각하다가 걸음을 돌렸습니다. 지나왔던 곳,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수수료 없이 돈을 찾을 수 있는 주거래 은행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죠.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고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자 두 명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고 근처에서 잠시 딴청을 피우며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뜨자 슬쩍 말을 붙였.


또박또박 써 있는 한국어 글귀를 보며 혹시나 싶어 물어봤지만, 한국어로 대화는 못한답니다. 별 수 없이 제 짧은 영어 실력으로 띄엄띄엄 몇 마디를 나눴죠. 스물네 살. 터키에서 왔다며 "형제의 나라! 반가워요."라고 하는 그의 말이 추운 날씨 아래 유독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인스타그램을 하냐며 자기 계정을 알려주기에 팔로우를 눌렀습니다. 6천여 명의 팔로워를 가진 제법 잘 나가는(?) 친구더군요. 그가 늘어놓은 핸드메이드 팔찌 중 하나를 고르고 일부러 찾아왔던 만 원짜리를 건네줬습니다. 반바지 차림으로 앉아있는 그에게 "날씨가 춥다. 건강 조심하라."고 인사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글쎄… 예전에도 비슷한 기억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한 지인은 제게 '호구 아니냐'라며 시크하게 반응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단언컨대, 후회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꾸만 발걸음을 붙잡던 "밥 먹고 싶어요."라는 그 문장이 더 이상 마음에 밟히지 않아 기니다.


물론 저 역시 그리 풍족하게 사는 건 아닙니다. 또, 그에게 건넨 만 원짜리 한 장이 엄청나게 큰 돈인 것도 아니죠. 하지만 그저, 이런 기회로 말미암아 작지만 특별한 기억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동안 이 팔찌를 볼 때마다 그 웃는 얼굴이 생각날 듯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그의 여정에도 평안이 깃들기를.


반가웠어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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