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백지 위를 달리는 펜의 감촉. 그냥, 그게 좋아서
# 1.
최근들어 에픽하이가 내놓은 새 앨범을 종종 듣곤 해요.
원래, 멜론 순위차트에 '연애소설'과 '빈차'가 떴을 때 한두 번쯤 반복해서 들은 정도였어요. 그 다음엔 두 곡 모두 기존에 랜덤으로 듣던 수백 곡의 플레이리스트 속에 담겨버렸죠.
그러다가 지난 주, 미용실에서 앉아 있는 동안 <에스콰이어> 최근 호를 보게 됐는데요. 정우성 에디터가 쓴 에픽하이의 최근 인터뷰가 실려 있더라고요. 거기서 이번 앨범에 담긴 에피소드들을 읽게 됐고, 'BLEED'라는 곡을 반드시 들어봐야겠다 싶었죠.
왜 딱 그 곡이 듣고 싶었느냐 물으신다면… '여전히 펜으로 백지 위를 달린다'라는 미쓰라 진의 마지막 가사 때문이라고 답하겠어요.
'BLEED'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 가사는, 심지어 멜론 곡 정보에 나오는 가사 텍스트에도 표시돼 있지 않아요. 뭐랄까… 그래서 더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죠.
# 2.
고향집에 내려가면 가끔, 2층에 있는 방에 올라가곤 해요.
스무 살이 되기 이전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던, 정말 오랫동안 내 방'이었던' 곳이에요. 별 생각없이 둘러보다 보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로부터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기도 하죠.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눈길이 가는 건, 낡은 책장 곳곳에 꽂힌 노트들이에요. '언제 이렇게 많이 썼나' 싶은 것들을 한두 권 꺼내 들춰보면, 몇 페이지 쓰다만 것도 있고 마지막 장까지 가득 채워진 것도 있더라고요.
설익은 이성과 감성으로 빼곡하게 채워둔 글씨들. 지금과는 달리 필체에도 매우 힘이 들어가 있어서, 쓰느라 손이 꽤 아팠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에도 줄 하나 삐져나오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걸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참 피곤하지 않았을까 하는 한참 늦은 걱정도 들죠.
# 3.
메모는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에도 엄청나게 많아요. 책상 아래 쌓아둔 스프링 노트만 몇 권인지 모르겠네요. 질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채워져 있는 녀석들. 물론 아직 다 채우지 않은 노트가 절반이 넘지만, 텅 빈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녀석은 없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무수한 백지 위에 남겨놓은 펜의 흔적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해요. 아니, 메모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들이 대부분이죠.
만약 다시 찾아보고자 했다면… 스마트폰 메모 앱에, 또는 클라우드 연동이 되는 노트 앱에 적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실제로 그렇게 적어놓은 메모들도 차고 넘치게 많음에도 그리 자주 들춰보지는 않지만요.
다시 볼 것을 기약하지도 못하는데 뭘 그리 많이 적었을까.
생각해보니, 그냥 난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거였어요. 그 중에서도 키보드나 터치 패드를 두드리는 것 말고, 사각사각 종이 위를 지나가는 연필이나 펜의 감각을 특히 좋아하죠.
다시 보려고, 잊지 않으려고, 언젠가 내가 쓰는 글에 소재로 쓰려고…
그래요, 물론 그 모든 이유도 틀린 건 아니에요. 나라는 사람의 생각으로 스쳐갔던 수만 가지, 그들 중 운이 좋아 어디든 기록으로 남겨진 수백 가지, 그들 중 정~말 미치도록 운이 좋아 글로 남겨진 몇 가지가 그걸 증명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변하지 않네요. 'BLEED'의 대미를 장식한 미쓰라 진의 가사처럼, 여전히 펜으로 백지 위를 달리는 게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