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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무게

바로 그거였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

by 이글로

성인 독서율 역대 최저…

월평균 독서량 8.3권으로 줄어…


흔히 볼 수 있는, 그러면서 나에게 참 과한 영향을 준 뉴스들이다.



그래도 책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입장인데…
'평균'보다는 많이 읽어야 하는 거 아닐까?



서점을 빙글빙글 배회하다가 빈 손으로 나올 때가 부지기수고, 도서관에 가겠다고 몇 달째 마음만 먹고 결국 실천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스스로 경각심을 부여하고 유지하며 자꾸 책을 샀다. 틈틈이 '독파'했다. 그놈의 '평균'은 넘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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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게 없었다.


틈틈이 큰 의미없이 끄적이곤 하는 글에서조차 표현력이 떨어졌음을 느끼는 건 여전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몇 페이지 씩이라도 넘기는 데 느꼈던 뿌듯함은 다 뭐였을까. 혼란스러웠다.


어느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불과 두어 달 전쯤 '독파'했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공간이 부족해 다른 책들이 꽂힌 위에 눕혀서 넣어뒀던 책. 무심결에 꺼내서 봤는데… 아뿔싸. 새로운 책을 읽는 기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큰 줄기는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 당시 무슨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득 빼곡하게 채워진 책장을 다시 본다. 다 읽었다며 꽂아뒀던 게 기억나는 몇 권을 빼들고 다시 살펴보니 상당 수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래된 기억이라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다 문득, 책장 제일 아래칸에 잘 띄지 않던 곳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2003년에 출간된, 자그마치 15년이 돼 가는 누군가의 자서전이다. 출간된지 얼마 안 됐던 때에 샀던 기억이 났다. 즉, 읽은지도 상당히 오래됐다는 뜻. 그런데도 책 속 에피소드 중 몇 가지가 떠오른다. 인상 깊게 읽었던 일화와 대사도 기억난다. 무엇보다도, 책의 끄트머리에서 발견했던 영어 문장까지도 고스란히 생각난다.



The Greatest Sin that only the young can commit is to become ordinary.



그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요 근래 '독파'했던 책들이 불과 몇 달만에 가물가물해진 이유를 찾았다.


애당초 나는 속독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게다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인상 깊은 구절이 보이면 일단 어디가 됐든 필사를 해놔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좀 더 기억에 남고, 좀 더 애착이 가며, 언젠가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게 됐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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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느리더라도, 그래서 남들 몇 권씩 읽을 때 단 한 권을 읽게 되더라도, 내 속도에 맞춰 '제대로' 읽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일.


"나 요즘 일주일에 책 한 권씩 읽어."라는 식으로 누군가에게 내세우기 위해 해왔던 독서는 이제라도 그만두려 한다. 책 한 권에 담긴 문장 하나, 표현 하나, 단어 하나라도 더 기억할 수 있는 게 정말 나를 위한 독서니까.



그래, 내가 놓치고 있었던 건 바로 그거였다.


막연한 다독보다 훨씬 더 무거운, '한 권'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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