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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지런했던 하루

'좀 더 자주' 부지런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by 이글로

어제 술을 꽤 많이 마셨습니다. 다행히 많이 취하지는 않았어요. 좋은 친구들과 좋은 이야기를 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한창 부어라 마셔라 하던 때보다는 분명 주량이 줄었을 거라 생각하는 탓인지, 요즘은 술자리에서 가급적 몸을 사리는 편입니다. 잘 헤아리지도 않고 마시는 편임에도 예전처럼 인사불성이 되는 일이 없는 걸 보면 말이죠.


신기하게도, 8시가 조금 못된 시간에 눈을 떴습니다.


어젯밤 꽤 알딸딸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와, 채 술이 깨기 전에 잠들었음에도 말이죠. 저는 보통 평일 7시, 주말 7시 30분으로 알람을 맞춰놓는데요. 당연하게도 주말에는 알람이 울려도 끄고 다시 자는 일이 많아 별 소용없습니다. 그걸 감안하면 오늘은 제법 괜찮게 일어난 셈이죠.


침대에 엎어져 게임을 하며 미적거렸습니다. 따뜻하면 다시 잠들어버릴까봐 발만 이불 속에 넣어두고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놀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시장을 다녀왔습니다. 반찬가게에서 점심에 먹을 찬 몇 가지를 사올 심산이었죠.


어슬렁어슬렁 걸어 집에서 멀지 않은 시장을 다녀오니 얼추 점심시간이 가까워옵니다.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집에서 받아온 묵은지를 봤습니다. 또 갑자기 생각이 나 김치찌개를 끓였습니다. 찬장에 잠들어 있던 참치캔도 하나 따서 넣고~ 냉동실에 넣어둔 파와 다진 마늘도 팍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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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뒤 깜빡 잠들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일이긴 합니다. 술을 그렇게 먹고 들어와 새벽에 잠들었는데 8시에 일어났으니까요. 밥 먹은 직후에 잤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2시 반쯤 다시 일어났는데, 잠결에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바지 한 벌을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쇼핑하러 돌아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탓에 인터넷으로 일주일 넘게 알아보고 있었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벌 정도 직접 입어보고 사야 알맞은 사이즈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대충 씻고 느긋하게 걸어 강남역 거리로 나갔습니다. 지오다노에 들렀다가 허탕치고, 유니클로에 들렀다가 허탕치고, 마지막으로 들른 스파오에서 잘 맞는 청바지 한 벌을 건졌습니다.


예전보다 치수가 좀 늘어난 것 같았지만… '어차피 누가 날 들고 다닐 일도 없는데 몸무게 따위 신경쓸 필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사는지라 별 감흥은 없더군요. 그것보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새 옷을 건졌다는 만족감이 더 크기도 했고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습니다. 몇 달 전에 친구가 생일선물 겸으로 줬던 커피 기프티콘으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노트북을 켰습니다. 중단했던 소설 다음 편을 몇 자 끄적였지만, 도무지 전개가 풀리지 않아서 접어뒀습니다. 대신 최근 아는 형을 통해 시작한 부업으로 글 한 편을 썼네요.


6시. 본격적으로 울릴 준비를 하는 배꼽시계를 붙들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챙겨먹었습니다. 반찬은 뭐… 아까 먹었던 것과 같은 거였고요. 아, 시장에서 샀던 두부조림을 점심에 안 먹었다가 저녁상에 놓았다는 건 다른 점이군요.


낮에 묵은지를 탈탈 털어 찌개를 끓인 덕분에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묵은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이번 주 중으로 보내주신다네요. 무릇 자취생은 잘 익은 묵은지만 냉장고에 넉넉하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법이죠.


그간 집에서 보내주셨던 반찬을 먹고 쌓아뒀던 반찬통들을 꺼냈습니다. 내일 오전에 집으로 부쳐야겠다 싶어 박스를 하나 꺼내왔는데, 하필 또 타이밍 좋게 테이프가 떨어졌네요. 간만에 열심히 움직였는데 아직 부족한가봅니다. 더 움직이라고 하는 걸 보면요.


테이프를 사와서 박스 포장을 해놓은 다음에는 운동을 나갔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 번밖에 못 나가서 오늘은 꼭 나가야했거든요. 한강공원에 나가 풀업과 스쿼트를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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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하건대, 저는 참 게으른 편입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부분 머리'만' 부지런한 편이죠. 워낙 생각이 많은 편인 데다가 멀티태스킹을 참 못하는 성향이라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 아니면 종종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가끔, 스스로 생각해도 참 부지런하다 싶을만큼 움직이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처럼요. 특별히 부지런하게 보내야겠다 계획하는 건 아닙니다. 머리'만' 바쁜 놈이라 그런 다짐을 할 리는 더더욱 없고요.


그저 해야할 일이 생각이 나거나 눈에 띄었을 때, 갑자기 일어나 해버리곤 하는데요. 그런 날은 보통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가 눈에 거슬려서 그것까지 해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게 마음에 밟혀서 해치워버리고요. 예전에는 한 번, 아침에 며칠 밀린 설거지부터 시작해 빨래, 방 청소, 냉장고 성에 제거, 화장실 청소까지 하루에 끝낸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적당함'이야말로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들어맞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을 게으르게 보내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매번 고민하곤 했었죠. 좀 적당히 게을러야 할 텐데… 뭐 그런 생각 때문이랄까요.


하지만 오늘처럼 부지런한 하루를 보낸 다음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 준비를 할 때면, 이런 날도 있으니 따지고 보면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부지런하게' 살고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네, 뭐… 모태 게으름뱅이의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같은 '부지런한 날'의 빈도를 좀 더 늘릴 수 있다면, 그땐 정말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부지런하게' 사는 게 되지 않을까요. 그럼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테고요. 그렇지 않나요?


요즘들어 부쩍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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