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했던 그 이야기

몇 번을 더 하셔도 이젠 타박하지 않겠습니다.

by 이글로

술 한 잔으로 시작했던 자리가 어느새 무르익는 건 쉬운 일이다. 붉어진 눈가가 '취했다'는 걸 주장하고, 혀 꼬부라진 발음이 그 의견을 재청(再請)한다.


그럴 때면 그는 어떤 레퍼토리를 반복하곤 했다.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한지도 햇수로 어언 12년. 그 지난 세월 동안 몇 번이고 들어왔던, 늘 같은 기승전결로 반복되는 이야기. 항상 엇비슷하게 시작해 똑 닮은 결론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솔직히… 지루했었다.


그저 맨정신에 하지 못하는 말들을 늘어놓는, 일종의 술주정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겹지도 않냐고, 이젠 좀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타박 반, 위로 반으로 이야기하면,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저 씨익- 웃으며 그만둘 뿐. 그 멋쩍은 듯한 웃음에 한숨이, 그리고 서운함이 묻어있었다는 걸… 그 날의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느 날.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취해버렸던 어느 날. 나 자신도 그와 똑같이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언젠가 했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계속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마주앉았던 상대가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인지, 들었다면 몇 번이나 들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핏 생각해도 꽤 자주 그래왔으니… 그 중 누군가는 '아… 또 그 이야기네'라고 지루해 했던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다. 아마 난, 뭔가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과거 한때 이런 경험을 했고,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그 시절 이런 부분이 힘들었고, 이런 부분이 서운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말하지 못했다고.


말할 기회를 상대방에 넘길 때는 대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의견을 묻는 형식이었지만… 말짱한 정신에 생각해보니 사실 그건 '답정너'였다. "네가 옳았다" "넌 틀리지 않았다" "넌 충분히 애썼다"와 같은 말을 듣고 싶었던.


기회가 없어서. 타이밍을 놓쳐서. 막상 말하자니 소심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돼서. 그밖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때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남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그 중 어떤 것들은 마음 한복판에 단단히 뿌리박힌 듯, 몇 해가 지나도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몇 번인지 헤아리는 것도 의미없을 만큼 반복해서 들었던 그의 이야기에도, 지금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 담겨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그리 힘들게 살아와서, 그렇게 버텨와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어차피 돌아갈 수는 없는 거, 그만 잊자는 다짐을 왜 안 해봤겠냐고. 그래도 자꾸 떠오른다고. 무던히도 애써봤음에도 결국 이렇게 남아버린 게… 솔직히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뭔가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저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그저 듣기만 했던 나도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그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러자 그간 내가 위로랍시고 까칠하게 뱉어왔던 타박이 몹시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졌다.




선택을 하고. 미련을 남기고. 다시 생각하면 늘 후회를 하고. 누구나 겪으며 사는 시간들이 한 해 두 해 쌓일수록, 이젠 그 마음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에게는 단 하나뿐이었을 삶의 일부를 이미 오래 전에 지불해버린 사람. 그 덕분에 너무도 누리고 싶었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야만 했던 사람.


그 삶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삶으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할 수 있었기에… 적어도 나는 인정하고,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의 선택이 비할 데 없이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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