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아직 변하지 않았네요
(커버 이미지 출처 : pixabay)
어느 저녁. 무심코 바라본 책장에 빼곡히 꽂힌 스프링노트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표지를 갖고 있지만, 옆면만 보면 다들 고만고만한 녀석들이 나란히 늘어선 모습.
아니, 솔직히... 각양각색의 표지도 별 의미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각각의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때의 내가 뭘 적어뒀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요.
잡히는 대로 한 권을 꺼내듭니다. 팔락- 팔락-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 여백이 많은 어떤 페이지는 가볍게 넘어가고, 잉크를 가득 머금은 어떤 페이지는 한결 묵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냥 괜스레 신경이 곤두선 탓이려나... 아무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빙글빙글 주위를 맴돕니다.
노트의 거의 끝자락에서, 몇 년 전 쓰다 만 글 한 편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당시 SNS에 올리기 위해 꽤나 장황하게 써내려가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곳곳에 북북 긋고 고쳐 쓴 흔적이 있는, 하지만 끝내 빛을 보지는 못했던 애틋한 녀석이죠.
지금보다 한참 덜 자랐던 시기에 쓴 글임에도, 그 안에 담았던 가장 굵직한 마음가짐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뭐... 별로 특별한 건 아닙니다. "사람과 인간관계에는 늘 최선을 다 하겠다"라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내용.
다만, 시간을 거니는 동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는 게 사람일진대, 그 날 이후 꽤 많은 고개를 넘어왔음에도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좀 색다른 감흥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닙니다. 그때와 달리, 적어도 '모든 관계 = 동등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욕심과 아집은 조금 덜어냈거든요. 어떤 관계는 너무 두텁게 하려다가 오히려 탈이 날 수 있다는 것도... '배운 것'이라면 배운 것일 테고요.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려면 만나야 한다'라고 우기던 미련함도 이제는 구분할 줄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예의가 아닌 억지스러운 만남 대신, 집에서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으로 안부를 전하는 게 때로는 더욱 값진 관계를 만들어줄 수도 있음을 알게 됐죠.
일일이 적기 어려운 많은 경험들. 모두가 좋은 기억만 남겨준 건 아닙니다만... 그 모든 걸 감안하고서도 여전히, "사람을 남기는 인생이 가장 값지다 배웠습니다"라고 적었던 그때의 나에게 동의를 표합니다. ... 솔직히, 문장 자체는 좀 고쳐쓰고 싶지만요.
어쩌면 아직, 이 마음가짐을 뿌리째 바꿔버릴 정도의 큰 '전환점'을 못 만나본 탓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몇 차례 다치거나 꺾이는 경험을 하고도, 저도 모르는 새에 "그래도 틀리지 않았다"라는 확고함으로 덮어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고요.
아, 생각이라는 녀석이 또 어딘가로 날갯짓을 시작하려는 듯하네요. 서둘러 이번 생각을 매듭지어야 할 듯합니다. 어쨌거나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얻었다"라는, 그때의 내가 썼던 그 '많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모두 떠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의 나를 마주하고 있는, 미래의 어느날 다시 마주할 '또다른 그때의 나'를 남기고 있는, 지금의 나 어딘가에... 그 '많은 것'이 빠짐없이 담겨져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