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또 하나의 신분(?)을 소개하려 한다. 나는 게이머(Gamer)다. 그것도 '초식'(이 되고 싶은) 게이머.
한때 널리 쓰이던 신조어 중 '초식남'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전적 의미를 정리하자면 '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착한 남자'. (자매품 초식녀도 있지요)어... 음... 딱히 100%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뜻이다. 심심해서 영어사전도 찾아봤는데, 'nice and gentle man who is sensitive and have a girly senses'라고 나온다. 대체 영어사전에 이게 왜 있는 건지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아무튼 '초식'이라는 단어는 여유로움 또는 얌전함 등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초식형 게이머란 무엇이냐. 개인적으로 세운 정의를 소개하자면,
'공존'하는 플레이, '고독'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게이머
라 말하고 싶다. 짤막하게 표현하려고 앞뒤 자르다보니 좀 뜬금포가 됐는데,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경쟁보다는 공존을 추구하는, 여유로운 성향의 게이머. 파티(팀) 플레이보다는 혼자 노는 것을 선호하는, 타인에게 맞춰가기보다 스스로의 페이스를 더 중요시하는 게이머.
하고 싶을 때 하고, 싫증나면 언제든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게임 라이프를 영위하고 싶다는 뜻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정의이니 태클은 정중히 반사......)
그렇다고 채식주의자(Vegetarian)인 건 아닙니다.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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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네가 농장 게임을 한다고?
살면서 저런 비슷한 종류의 감탄사(?)를 수도 없이 들어봤다. 180에서 몇 cm 모자라는 그저그런 키, 큼직한 어깨와 상체, 두꺼운 팔다리. 내 외모를 자평하자면 우락부락한 '전투민족'에 가깝긴 하다. 표정만 좀 굳히고 있어도 어지간한 일로는 타인의 접근을 예방할 만한 외모랄까.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외모 묘사는 여기까지만 해두겠다. 나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게임을 한다는 말만으로도 색안경 낀 시선을 마주하곤 하는 사회. 특히 우리나라는 꽤 심한 편이라고 본다. 그 고비를 넘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어찌어찌 통과하더라도 내겐 또 하나의 장벽이 존재한다. '외모에 어울리는 게임'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이름의 벽.
게임기자로 일하던 시절, 함께 입사했던 동기가 회사 홈페이지에 올라갈 내 소개글을 적어준 적이 있다. '외모만 보면 소를 키우는 사람인지, 잡는 사람인지 헷갈린다'라든지, '터질듯한 팔 근육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든지 하는 문구들로 빼곡한 내용이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생겨먹은 건 그렇다치고...... 그것과 어떤 게임을 즐기는지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같이 생긴 사람은 뭐 맨날 베고 썰고 찌르고 하는 게임만 하라는 법 있나......
왜, 뭐, 왜! 내가 소 좀 키우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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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생적으로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 세우는 짓거리도 둘째 가라면 서럽다. 딱히 자랑은 아니지만...... 누군가 앞서나가는 것을 잘 참지 못하고,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일일수록 더하다. 게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겨먹으려 했고, 시도때도 없이 게임에 매달리다가 '훼인' 취급을 받은 적도 없진 않다. (그래, 솔직히 좀 많다.) 그렇게 해서도 잘 안되면 억지를 부려 말로라도 이겨먹곤 했었다.
그런 삐뚤어진 성질머리를 좀 고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좀 '잊고' 싶었다. 승부욕이라는 놈은 일단 발동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고, 겨우 만족시킨다 해도 성취감 못지 않은 피곤함이 따라다녔다. 이 애물단지 같은 감정...... 최근 깨달은 거지만, 딱히 승부욕을 충족시키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은 없더라. 전혀. 아, 그때 느낀 삶의 허무함이란. (고작 게임 따위에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니, "여기 OTL 곱배기 하나요......")
어느정도 정신 개조에 성공하면서 '사람과 겨루는 게임'을 꺼리게 됐다. 흔히 'PvP'(Player vs. Player)라 불리는 콘텐츠에는 영 의욕이 없었고, 자연스레 남의 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LoL은 손도 안 댄다.) 기록 세우기나 랭킹 달성 같은 건 관심 밖이고, 남들이 '안 할 것 같은' 짓을 찾아다니곤 했다.
온라인 게임을 할 때면 주로 혼자 놀러 다니거나 마을에 서서 채팅을 즐기고, 가끔 협동 플레이 정도만 하는 한량 타입이 됐다. 그마저도 시간이 길어지면 아예 안 해버리다보니, '레이드'(Raid : 원정 혹은 공습이라는 뜻으로, 게임에서 다수의 인원이 모여 진행하는 방식의 콘텐츠. 다른 것들에 비해 대개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에 속한다) 같은 건 거의 안 하기 일쑤였다.
콘솔/패키지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 같은 건, 타고난 집중력이 워낙 빈약하신지라 평균 30분, 최장기록 2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그렇게 내 멋대로 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놈의 '소 키우는 게임'에서 고레벨을 찍은 뒤였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내가 원하는 게이머 타입은 오른쪽 거북이 같은 느낌이랄까... (네이버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 中)
이제는 고전 중의 고전이 돼 버린 <시저4>. 이런 평화로운(?) 게임 완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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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페이스로 살고 싶다.
승부욕이라는 DNA를 달고 태어난 탓에, 타인의 시선과 위치를 의식해야하는 빌어먹을 상황을 꽤 많이 겪었다. 무수한 태클로 인해 상처투성이 마음을 얻어가면서, '나만의 페이스'를 구축하는 일은 더없이 절실한 과제가 됐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항상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그건 누구라도 아는 일반적인 명제다. 즐겁지 않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분명 있다. 그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꼭 해야하는 일이 아니라면, 보다 즐거움을 추구해야 마땅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게임을 하면서조차 타인과 겨뤄야한다는 것. 내겐 즐거움보다 스트레스가 앞서는 일이다. 사회에서도 1등 경쟁 때문에 머리털 곤두설 일이 수두룩한데, 왜 게임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외쳐야만 하나. 스트레스 풀려고 한다면서, 왜 게임에서 육두문자와 패드립을 감내해야 하나. 즐겁지 않다면, 그걸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며 해야할 이유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인생은 지금도 충분히 복잡하고 피곤하다. 게다가 슬프게도, 앞으로 지금보다 난전(亂戰)이 됐으면 됐지 단순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비록 게임을 좋아하지만, '살면서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취미'일 뿐. 만약 즐겁지 않다면, 언제가 됐던 다른 길을 찾을 것이다. 괜스레 욕하고 인상 써가며 다른 사람들까지 불쾌하게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글자 그대로 '취미'처럼 적당히. 에고, 난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과연 가능하긴 한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오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