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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Aug 17. 2024

남아있던 나의 '감수성'에게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오래된 보물

오래전 종영했던 드라마를 봤다.


본래 영상보다는 글을 즐기지만,

휴대폰을 바꾸는 과정에서

티빙을 몇 개월쯤 쓰게 됐고,

이 기회에 못 보고 지나쳤던 드라마를

한두 편쯤 보자 싶어서였다.


보다가 몇 번쯤 울었다.

이야기에 한껏 몰입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났다.

가상의 인물과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감정에 공감해 버린 것이다.

(그 절절했던 마음을 문자로 적어놓으니

이렇게 건조하고 담백할 줄이야...

아직도 글쟁이로서 갈 길이 멀다.)


장면이 지나간 뒤 다시 생각해 보니

놀라운 일임을 깨달았다.


나에게 이런 감수성이
아직 남아있었다니...




어릴 적부터 눈물이 많긴 했지만,

그건 감수성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본래 감수성이란

타자(他者)에 대한 공감이 본질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벌어진 일을

내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내 눈물은 대개 내 마음에 관한 것이었기에,

감수성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시절 썼던 글을 가끔 발견할 때 보면,

적어도 감수성이 메마른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던, 딱 그 정도였달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바깥의 일에 관심이 줄어,

세상 물정을 알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타인의 일상 겉면을 둘러보기도 벅찬 와중에,

이따금씩 발견되는 예전의 글처럼

감수성이 담긴 글 다는 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억지로 짜내려 해 본 적도 있지만...

의미 없는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그렇게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던 감수성은

영영 나를 떠났다고 여겼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을 때,

놀라움 다음으로 반가움이 왔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오래된 보물을

다시 발견한 기분이라 하면 어울릴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그저, 여유 없는 삶에 시달리느라

감수성의 역치가 높아졌던 탓일지 모른다고.

혹은 감수성에도 '방향'이라는 게 있어,

나와 방향에 맞지 않는 감수성에는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뿐일지도.


아무튼,

아직 나에게 조그맣게나마 남아있어 줌에

감사한 마음이다.

진작부터 가고 싶었던,

이제서야 가보려는 그 길에는

감수성이 꼭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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