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떡처럼 말한 걸 개떡처럼 알아들은, '복선'에 관한 해석
이 작품에서는 이 부분이 복선이다.
중요하니까 기억해둬.
외웠다. 정말 달달 외웠다. 생각하거나 의문을 품을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복선(伏線)이라는 것이 글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그 부분이 복선이 되는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까지도. 애초에 '복선'이라고 외우기만 했지, 글자 단위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도 교복을 벗고 난 뒤의 일이다.
조용한 모범생이 되고 싶었던 걸까? 글쎄, 몇 번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겁이 많았고, 귀찮은 일을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 아마 그 뿐이었을 것이다.
복선(伏線) [명사]
1.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남모르게 미리 꾸며 놓은 일.
2. 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미리 독자에게 암시하는 서술.
이야기에는 소위 ‘흐름’이라는 게 있다. 워낙에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말로 풀어서 설명해 놓는 쪽이 더 헷갈리지 않을까 싶다.
흐름은 현재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다. 즉, 이야기에 재미를 부여하는 일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셈. 동시에, 흐름은 이야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이야기가 항상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어떨까? 결말을 뻔히 알 것 같은 이야기를 구태여 끝까지 봐야 할까? 이 질문에서 고개를 저으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이다.
물론, 독자들 중에는 이야기의 진행 과정 자체라든가 표현, 또는 묘사 등에 주목하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면 '흐름이 뻔히 보이건 말건 그냥 재미있으니 보겠다'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다. '도중에 손을 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놓치지 않고 빨아들일 수 있어야' 정말 멋진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그렇기에 복선을 이해하고 써먹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주목한 복선의 특징은 '숨겨진 흐름'.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학교에서 배워왔던 복선은 '암시가 어떻고 블라블라'하는 식으로 좀 더 오묘한 느낌이긴 하던데…… 솔직히 주입식으로 배운 게 명쾌하게 기억나지는 않기에 다른 부분은 일단 제껴두련다.
앞서 뿌려둔 이야깃거리들을 적절한 시기에 딱! 피워 올리는 방식. 이야기의 커다란 흐름과 분명히 함께 나아가고 있었지만, 독자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또 다른 흐름이 바로 이때 드러난다. 흠…… 요즘 즐겨보는 웹소설 등에서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떡밥 회수’ 정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훌륭한 복선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당연한 얘기겠지만 '드러내되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자들이 읽어나가는 이야기 속에 분명 뻔히 드러나있지만, 무심결에 지나치더라도 딱히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문득 어릴 적 숨바꼭질 같은 걸 할 때가 떠오른다. 술래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에 숨는 것보다는 ‘등잔 밑’에 숨는 쪽이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던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까?
다른 말로 풀어내자면…… ‘개연성(蓋然性)’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꼭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개 그러지 않을까, 하는 것.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바로 그거다. 톡 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냈을 때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이게 있었지!” 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다른 한 가지 요건으로는, 적당히 배치해야 한다는 것. 복선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너무 단조롭다. 너무 뻔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재미에서 상당부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복선이 있긴 하지만 너무 적으면 독자들이 금방 눈치채 버리게 마련이다. 들켜버린 복선은 이미 '숨겨진' 것이 아니게 되기에 생명력을 잃는다. 작자와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공개되더라도 임팩트는 그다지……
반대로 복선이 너무 많으면, 이야기 전체가 너무 난잡해져버릴 수 있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흐름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이것저것 숨겨진 흐름까지 짜맞추려면…… 아, 그건 스트레스다. 뭐, 요즘 볼륨이 큰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다보면 댓글에 추리 릴레이를 펼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독자들에게는 꽤 잘 먹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는, 적당한 게 최고다.
최근 한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은 뒤, 예전부터 꼭꼭 처박아뒀던 설정집 중 하나를 다시 꺼내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부족한 부분이 많을 거라는 걸 각오하고, 곧 선보일 예정입니다) 그러다보니 '복선'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이 글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자, 이쯤되면 내 목적은 거의 다 달성됐다. 이제 문제는 딱 하나가 남는다.
"그래, 다 이해는 했는데…… 막상 쓰려니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런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