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결로 사랑한다

by 유이경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께 전에 말했지요.
매번 같은 말만 하게 되네요.
그림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 그게 전부랍니다.

호아킨 소로야 바다, 바닷가에서 p12



스페인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는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거의 매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800통이 넘게 남아 있다. "나의 몸이요. 나의 인생, 나의 정신, 내 평생의 이상이오."라고까지 표현했으니 이게 말로만 듣던 소울메이트인가 싶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몸이고 인생, 정신, 평생의 이상이라니.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거기다 그 사랑이 쌍방통행이라고? 거기다 사랑에 빠지는 초반의 격렬함이 아니라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고도, 나이가 들어서까지 이어진다고?


어릴 때부터 나는 사랑에 회의적이었다. 극적인 사랑 이야기 중에서 호불호를 따지자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불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호였다. 조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쌍방의 강렬한 사랑보다 혼자 애가 닳다가 자신을 불살라 버리는 사랑이 더 와닿았다.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호는 금방 점점 불호가 되어갔다. 사랑이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까지 해, 싶은 마음이 커졌으니까.


그러면서도 실은 나도 계속 사랑을 했다. 주로 짝사랑이었지만. 내가 빠진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었던 적도 없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존감이 낮아서라기 보다 내가 숨기고 있는 파괴적인 모습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나를 온전히 이해받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진짜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았다. 이미 몇 번 내 속마음을 듣고 뜨악해하는 표정을 짓는 친구 앞에서 입을 다물었던 전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다 보여주느니 그냥 혼자 좋아하고 말지.


그럼에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웃고 밝지만 속은 나처럼 문드러져 있던 사람. 내가 어떤 독을 뿜어대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 물론 그 사람도 나도 호아킨 소로야 부부 같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분명 타고나는 걸 거다. 나는 내 결로 사랑한다. 적당히 서로 선을 지키며 서로를 전적으로 내어주지 않고 그런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 사실 이걸 아직 사랑이라고 지칭하는 건 좀 오그라든다. 이젠 의리지, 의리. 아니, 우정인가.


오늘도 나의 사랑이자 의리이자 우정은 자기 방에서 놀고 나는 거실에서 논다. 연애 때처럼 지금도 따로, 또 같이 지낸다.



그림 출처 : 호아킨 소로야, Mother, 1895 (아이를 낳은 아내, 클로틸데를 그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