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계속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착각

by 유이경


한 계절에 한두 벌뿐인 검은 옷을 제때 세탁해 입고, 최소한의 식료품을 가까운 가게에서 장 봐오고, 최소한의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바로 치운다. 그 기본적인 일들을 하지 않는 낮시간에는 대체로 거실의 소파에 꼼짝 않고 앉아서, 키 큰 나무들의 두꺼운 밑동과 푸르른 가지들을 내다본다.

한강, 희랍어 시간, p101




주부라는 삶이 그렇다. 하루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신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아침이면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내 끼니를 해결하고 하교한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간식을 먹이고 학원에 보내고 저녁밥을 차리고 치우고 아이 재울 준비를 하면 하루의 끝이 보인다. 생각 따위 하지 않아도 잘도 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하루의 틈 사이에 자신을 밀어 넣지 않으면 하루가 끝나는 밤 시간, 어김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패배감이 일렁거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봤다. 가족 구성원들이 내게 바라는 대로 엄마로, 주부로 기능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너 집에서 논다며, 라는 말을 해서가 아니다. 남들이 뭐하냐고 물을 때 스스로가 집에 있다고, 집에서 논다고 말해서가 아니다.


아이를 학교나 유치원에 보내고서부터 돌아올 때까지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가끔 주변에서 들었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무기력한 거다. 무얼 해야 하나,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해야만 하는 걸까. 아이를 중심으로 짜인 하루 일과에서 아이가 빠져나가버린 사이 시간 동안 주부들은 대개 집안일을 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집안일을 하면서 무기력해진다. 점점 자유의 몸이 될수록, 그 기간이 쌓일수록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기도 한다.


나도 간혹 혼란과 무기력증에 빠진다. 그래서 이 글도 한참 전에 초고를 쓰고 그대로 모른 척, 죄책감을 느끼며 방치해 두었다. 무언가 큰 일, 마감 이런 걸 해내고 나서 빠진다고들 하는 무기력증을 나는 책을 쓴 이후가 아닌 요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상 사이에서 겪는다.


회사 다닐 때, 회사를 관두고 아직 아기였던 아이를 키울 때 혼자만의 시간을 얼마나 바랐던가. 혼자 낮의 열기를 온몸에 받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바랐던가.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 것도 잠시, 나를 잠식하기 시작한 건 불안이었다. 무얼 해야 하나,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해야만 하는 걸까. 내 하루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언젠가 친구가 말한 것처럼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부지런한 사람인가 보다. 무언가 하지 않는 틈새를 참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그런데 이게 꼭 내 성격 때문만일까. 무언가를 하라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부르짖는 요즘 세상 탓도 좀 있지 않을까. 난 경단녀 주부였지만 이걸 해서 이렇게 돈을 벌어, 이렇게 유명해졌어, 이렇게 쉬운데 넌 왜 그러고 있니. 패기와 성실로 무장한 성공담의 독려 아닌 독려.)



그런데 정말 난 아무것도 안 한 걸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게 묻는다.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니. 올해 출간 계약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이 나왔고, 책모임도 도서관 봉사활동도 성실히 했고, 루틴대로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술을 마셨는데.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불안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흔들고 싶다. 뭔가 억울하다. 기억에 남을, 한 해였는데.


글을 쓰다 말고 아이 뒷바라지를 하다가 벌컥 아이에게 화가 났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화에는 분명 그냥 화가 아닌 불안과 우울이 있었다. 내 불안과 혼란과 무기력에 우울증이 숨어 있는 걸까. 갑자기 우울증 테스트를 해보고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를 검색해 본다. 언제나 검색은 빠르다.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을 뿐.


이런 내 상태가 지속되는 이유가 뭘까 싶어 손가락이 빨라졌었다. 내 나이대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일, 검색. 새로운 직업, 일자리, 자격증, 공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일을 시작하면 사라질까 싶어서. 그래서 내가 일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운을 떼 보았다. 둘 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굳이? 지금? 이런 그들의 반응이 자신들의 삶이 불편해지는 것 때문임을 안다. 정아은 작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그들 몫의 생명 유지 활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에잇, 괜히 더 우울해졌어.



생각만 넘쳐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뒹굴거리다가 괜히 부지런을 떨어볼까 마음이 선다. 몇 년을 하지 않았던 다이어리를 다시 사서 하루하루를 세워볼까, 내년에 자격증을 따 볼까, 프리랜서 일을 다시 찾아볼까, 진짜 이번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 볼까.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이런 불안은 다들 있는 거겠지? 주부는 이런 불안, 주부가 아닌 사람은 또 저런 불안, 그렇게 한 번씩 넘실대며 다가오는 파도를 넘어가며 사는 거겠지?


어떻게 지혜롭게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잠시 혹시 갱년기 우울증인가 의심도 했다가 아직 갱년기는 아닌데 했다가. 아직도 갈팡질팡 갈지자로 돌아다닌다. 언제나 그렇듯, 내 상태가 갈지자이다 보니 글도 갈지자다. 요즘 내 글이 갈무리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이유다. 생각이 널을 뛰고 정신은 집을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나를 벗어난 글은 헛돌고, 헛돌고, 헛돈다. 내가 봤을 땐 이러다 이 글은 영영 마무리를 못할 거 같다. 가볍게 의식의 흐름으로 쓰던 다른 글들과 달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담아서일까. 역시 얕은 사람이다 보니 얕은 고민을 살짝 얹은 글만 좀 쓸 수 있나 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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