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싫다. 습도도 싫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오래 틀면 춥다. 그런데도 결혼 전, 심각하게 동남아시아로 주거지를 옮기고 싶었다. 그 당시엔 더위도, 습도도 우리나라 여름보다 월등히 높았는데도 말이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모두 내려놓게 되었다. 더위와 습도 때문에 쉴 새 없이 흐르는 땀도, 땀 때문에 온몸에 옷이 쩍 하고 들러붙는 것도, 한 번씩 콰르릉 쏟아지는 소나기도, 도심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들도, 바닷가에서 묻어온 채로 절대 떨어질지 모르는 모래알들도 모두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뭔가 대단한 깨달음에서 이른 것 같이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신경 쓰고 짜증 내고 별 짓을 다 해도 소용없단 걸 알게 되는, 거의 반강제적인 깨달음에 가깝다.
반강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옷이 땀 때문에 몸에 들러붙는 것도, 모래알이 몸과 소지품에 붙어 있는 것도 용납하지 않던 한국의 내가 사라진다. 어느 애니메이션처럼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녀석의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깐깐이'일 텐데, 그 녀석이 동남아시아의 더위와 습도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없어진다.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우리나라 보다 상대적으로 느린 시간 개념,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 느린 발걸음, 주변인으로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사는 게 참 별 거 없네. 그게 좋아 보였다.
그들도 분명 가열차게 힘든 인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살고 있을 거다. 나는 주변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 거다. 우리 돈 얼마면 마음껏 취할 수 있는 음식들도, 물건들도 그 안에서 살다 보면 의미 없어질 이야기다. 관광객인 내겐 와닿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산다면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지인이 투덜거렸던 그 모든 이야기가 모두 내 일이 될 거다.
하지만 한 번쯤 살고 싶은 나라들을 떠올려보는 재미난 상상 속에서 나는 그들처럼 느슨해진다. 느슨해져도 좋다. 느려도 좋다. 그러면 그들 나라 특유의 쨍하고 빵빵한 에어컨이 날 깨워줄 테니. 깨워주기만 하고 날 감기에 이르게 하진 않을 테니. 그들 나라의 에어컨은 오래 맞고 있어도 춥지가 않다.
이젠 우리나라 여름이 동남아시아 날씨를 따라잡았다. 굳이 날씨만으로는 이동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온도도, 습도도 높아졌는데 아무것도 내려놓을 게 없다. 아니, 내려놓을 수가 없다. 나도, 사람들도 더워도 습해도 여전하다. 투덜거리며 더위와 습도를 위한 제품을 쇼핑할 뿐, 느슨해지질 않는다.
그러니 어째. 그 분위기를 느끼러 가야지. 철저히 주변인으로서. 에어컨 바람 오래 쐬면 아이가 감기 걸릴까 항상 노심초사하는 마음까지 사르르 녹아버릴 곳으로 아이와 함께 가야지. 한국 여름을 떠나 동남아시아 여름으로 잠시라도.
사진: Unsplash의Evan Kra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