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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Jan 28. 2024

그러나 술 안 마신 지 한 달이 되었지


  토요일 저녁, 이제는 우리 집 기본 배경소리가 되어버린 구독자 270만을 자랑하는 어린이 대상 유튜브 채널 소리 사이로  수상한 신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한다.


  "으으으으 으어어어어."


  "으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흐윽흑 으으으으."


  계속되는 소리에 유튜브에 빠져있던 잼이 참지 못하고 나선다. 



  "엄마!"

  설거지통으로 당장 투입되어야 할 그릇들과 프라이팬들을 그대로 식탁과 싱크대 위에 둔 채 초점 잃은 눈으로 배회하는 나를 멈춰 세운다. 



  "으어어어어어(왜?)."

  "엄마, 술 취한 거 같아."

  "으어(응)? 으으으으어(술 한 잔도 안 마셨는데)?"

  한심하다는 눈빛을 쏴대는 잼에 쫄아들어 좀비어를 잠시 내려두고 인간어를 사용한다.


  "술 한 잔도 안 마셨는데 취한 거 같아?"

  "응."

  "진짜... 으으으으으."



  토요일 저녁은 술 마시는 시간. 그러나 나는 술을 안 마신 지 한 달이 되었지. 몸의 세포 어디에도 알코올 찌꺼기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을 깨끗한 나를 술 취한 인간으로 격하시키다니.



  "근데 엄마 술 마시면 안 이러잖아."

  술 마셨다고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왜 술 취한 거 같다고 말했을까 궁금해진다. 

  "왜 이게 술 취한 거 같아?"

  "아니, 드라마 이런 데에서 나오는 술 취한 모습 그런 거 같아서."

  우리 잼이는 술 취한 모습을 드라마로 배웠구나. 그럼 날 보고 취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을지 궁금해 다시 물었다.


  "아니."

  역시. 완벽하군. 잼과 남편과 외식하러 가서 술 마시고 돌아오면서 '나 술 취했네.'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눈치채지 못했다니, 역시 술 취해도 완벽한 몸가짐. 혼자 흐뭇해하다가 술 취했네 싶었던 날들에 돌아오는 길에서 잼과 난리를 치며 장난쳤던 일들이 떠올랐다. 하긴 술 마시나 안 마시나 잼과 함께라면 극 E처럼 오버스럽게 행동하는 건 똑같으니 잼이 모를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생각할수록 술 마시나 안 마시나 티가 안 나는 게 내가 떠올린 긍정적인 모습의 반대인 것만 같아 성큼성큼 오려는 현타를 물리치며 다시 잼에게 물었다.



  "그럼 아빠는?"

  "아빠는 조금."

  크하하. 나의 승리다.


  "어떤 거 보면 느껴지는데? 빨간 얼굴?"

  "아니, 아빠 자는 거 보면 술 취했다 싶어서."

  "하긴 너네 아빠 자는 모습 보면 딱 봐도 취했네 취했어 싶지."

  "응, 웃기게 자."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떤 맥락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으나 무언가 대단히 논리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 계속 듣다 보면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는데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듣게 만드는 요상한 술버릇을 가진 남편은 자신이 취해도 취한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걸 큰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나의 큰 장점이기도 했던 바, 그런 면에서 술에 취해 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얌전히 자는 내가 이긴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이 결론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동의가 꼭 필요한 승리는 아니니, 남편을 이기는 걸 큰 기쁨으로 삼는 나의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잼은 계속 아빠가 술이 취해 잘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어떻게 굴러다니는지 이야기한다. 신나서 떠드는 잼을 소파에 앉혀 끌어안고 함께 한참 낄낄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문을 열고 양손 무겁게 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 모녀가 끌어안고 수다 떠는 일은 일상다반사인지라 슬쩍 눈길만 주고 부엌으로 가 장바구니에 들었던 물건들을 냉장고로 옮긴다. 


  "언제 또 나갔었냐?"

  "아까. 오징어 사 왔는데 먹을래?"

  "됐다."


  쟁반 위에 말린오징어와 캔맥주 하나, 유리컵 하나를 올려 유유히 방으로 사라지는 남편을 바라본다. 한 다섯 시간 뒤면 얼굴이 빨개져서 또 코를 골며 굴러다니게 될 남편을 상상하며 승리감을 고취시키려는데 잘 되질 않는다. 잼은 엄마 품에서 벗어나 다시 27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에게로 돌아가고, 나는 여전히 설거지할 그릇이 가득인 부엌으로 터덜터덜 돌아간다. 남편이 저녁을 함께 먹었으면 시켰으련만, 젠장, 마신다고 저녁을 건너뛴 남편이 야속하다.



  치-익, 깔꽐꽐꽐꽐꽐꽐. 남편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으으으으으으어어어, 으으으흐으으헉."


  다시 나를 좀비로 만드는 소리. 토요일 저녁은 술 마시는 시간. 그러나 나는 술을 안 마신 지, 아니 못 마신 지 한 달이 되었지. 몸의 세포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알코올을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으으어허허어어어."


  "엄마, 또 왜 그래! 시끄러워!"


  "으어어어어어으으으으으."






잼 : 초등 중학년과 고학년 사이 어드매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UnsplashMotoki T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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