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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Feb 11. 2024

학원을 다니는 인간도, 세끼를 차리는 인간도



  "인간한테 차라리 지능 이런 게 없으면 좋겠어. 왜 이런 걸 다 알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오늘도 이불 위로 엄마를 불러들인 잼의 맥락 없는 대화가 시작된다.


  "역시 우리 딸, 엄마도 맨날 그런 생각..."

  습관처럼 콩깍지로 받아치는 엄마의 말은 상관하지 않고 갑자기 잼이 급발진한다.


  "아니, 내가 왜 굳이 수능을 봐야 하고 왜 굳이 돈을 벌어야 해? 차라리 조선시대가 나은 거 같아. 왕 없고 여자들 차별 그런 거 없고 꼭 아기 낳아야 하는 거 아니고 그러면 진짜 조선시대가 나을 거 같아. 지금이랑 비슷한데 인간들이 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우리 안콩이는 놀고 먹고 자고 싸고 사랑받고만 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맨날 자고 놀고 먹고 싸고 열심히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먹고 자고 이거 반복하잖아. 주말 빼놓고 다 이렇게 하잖아. 자고 먹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먹고 집에서 일하고 살짝 놀고 자고 노는 시간이 별로 없어!"



  이 모든 건 우리 집 얼룩이 고양이 때문이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가끔 만져주고 츄르만 주면 만사 오케이예요란 표정으로 거대한 몸집을 뽐내며 이상한 포즈로 드러누워 있는 우리 집 고양이 말이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안콩이의 포즈는 내게만 기능한 게 아니었나 보다. 네 말이 맞다, 다 맞다, 인생무상을 중얼거리며 이불에 누운 김에 그대로 눈을 감고 제3의 세계로 떠나고 싶은데 잼이는 할 말이 한참 남은 것 같다.



  "물론 난 노는 시간이 꽤 되긴 하지만. 방학 아닐 때 밥 먹는 시간 빼고 노는 시간이... 중얼중얼-뭐라고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한참 계산하는 중- 그런 다음에 한 시간 정도 노니까 두 시간 반 놀 수 있네, 평일에."

  '그럴 리가 없는데. 뭐, 그래. 그렇다고 쳐주자.'

  "학원 같은 거 없애고 학교만 갔으면 좋겠어. 왜 학원을 만든 거야. 굳이 없어도 될 거 같은데."

  뜬금없이 등장한 학원 존재 의미 논란,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가 이거였니.



  "근데 너 학원 가는 거 괜찮아하잖아?"

  "근데 없었으면 좋겠어. 요즘 사람들이 학원 때문에 스트레스 많잖아. 그래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오호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아니, 꼭 그건 아니고."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다른 사람들 때문이란 이유는 집어넣고 말을 이어나간다.



  "우리 반 쌤이 스스로 예습하는 게 좋다고 했어. 그게 좋은 거 같아. 내가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했어. 뭐, 아무튼 그렇대.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아. 혼자 알아내려면 엄청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그러니까 힌트만 주면 좋겠어. 그러면 오래 생각하다가 아하, 하고 알게 되겠지. 그럼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스스로 알게 된 거니까."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는데, 이번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싶어 던져본다.

  "그럼, 예습을 해."

  "이미 학원 다니고 있잖아. 학원 숙제하느라 할 시간이 없어."

  "너 학원 안 다닐 때에도 안 했잖아."

  "엄마, 나 그땐 디딤돌 했잖아."



  초등학교 1학년 때 설렁설렁 풀다가 때려치운 그 문제집을 말하는 건가. 그 이후에 아주 푹 쉬었던 시절은 까먹고 무슨 디딤돌 타령을 하는지 어이가 없어 조목조목 일깨워줬더니 뭐라고 한참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구몬도 하지 않았냐, 학원이 어쩌고 학교가 어쩌고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말도 참 많다.



  "그런데 너 수학학원 다닌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잖아."  

  그냥 적당히 받아주면 되련만 나도 참 지지 않고 계속 반론을 제시한다. 잼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지 알면서도 나도 참 짓궂다 싶다. 나 좀 힘들어, 나 좀 더 놀고 싶어.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도 다른 아이들 보다는 잘 놀고 있는 거 같으니 돌리고 돌려서 이야기한 거겠지. 그걸 알면서도 굳이 토 다는 나, T인가.




  어제 설날에 엄마네 갔더니 언제나 그렇듯 엄마는 점심상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다. 떡국 간을 보며 갈비찜을 데우며 조기를 부치며 김치를 썰어 담으며 한참 점심 준비에 열을 올리다가 엄마가 불쑥 그런다.



  "아휴, 인간은 뭐가 이렇게 복잡한 지 모르겠다."

  "응?"

  "해 먹는다고 음식을 이렇게 잔뜩 하고, 이거 만든다고 준비를 잔뜩 하고, 또 이거 치우려면..."



  익숙한 전개의 대화다. 그러니 급발진하는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러니까! 내가 진짜 맨날 생각하는 거라니까! 인간이나 이렇게 먹는 거에 난리를 치지, 어느 동물이 그래. 그냥 먹으면 되지, 뭘 맨날 요리를 하고 앉았고, 진짜 요리하고 나면 치우고, 치우고 나면 또 요리하고, 으윽!"



  급발진하는 딸에 엄마도 함께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동의 양에 대해 토로한다. 학원을 다니는 인간도, 하루 세끼를 차려야 하는 인간도 사는 게 힘들다. 해야 하는 일들에서 벗어나 내 발 밑에 우람한 덩치를 뽐내며 드러누워있는 저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 진다. 하지만 각자의 괴로움은 각자의 괴로움일 뿐.



  집에 돌아와 엄마가 준 반찬 두어 가지로 차린 저녁 밥상을 보고 잼이가 하는 말만 들어보아도 그렇다.

  "오늘 반찬이 좀 적은데?"

  학원 다니는 인간은 하루 세끼를 차려야 하는 인간의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피아노 학원 말고는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잼 : 하루에도 열두 번 '쑤우~~'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초등 중학년과 고학년 사이 어드매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우리 집 안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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