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경 Sep 25. 2020

시금치 된장국, 베를린 천사가 있는 그 집

왜 이 작은 시장 안 좌판에 ‘베를린 천사의 시’ DVD가 있는 걸까. 예술영화라 칭해지는 이 영화를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해적판답게 가격이 만 원도 되지 않았다. 시금치나 살까 싶어 슬렁슬렁 나왔다가 얼결에 나는 좌판 주인에게 오천 원을 건네고 DVD를 얻었다. (물론 해적판은 팔아서도 사서도 안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런 인식이 생기기 전의 일이다.)


    언니네 집에 머문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같이 밥을 사 먹으러 나가는 하루하루가 언니에게도 내게도 겸연쩍었다. 언니만의 공간에 침투해 공짜로 방 하나를 갈라 점유하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 아무 쓸모가 없어도 되나 싶었다. 그래서 밥값이라도 하려고 시금치 한 단과 두부 한 모, 김 하나를 손에 덜렁덜렁 사들고 언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언니 부엌을 뒤져 냄비와 양념과 멸치, 김치를 찾아냈다. 집에서 밥을 안 해 먹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인 건 있었다. 멸치 똥을 따고 냄비에 볶은 다음 물을 붓고 국물을 우려냈다. 멸치 육수가 우러나는 동안 시금치를 다듬고 두부를 넓적하게 썰어 놓았다. (시금치와 두부의 궁합 따위 모르던 시절이다.) 멸치는 건져내고 된장을 풀어 간을 맞추고 시금치 반 단과 두부를 넣었다. 다른 화구에 나머지 시금치 반 단을 데칠 냄비 하나도 올렸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앉히고 시금치 된장국에 남은 양념을 넣어 완성했다. 팔팔 끓고 있는 물에 시금치를 살짝 데쳐 나물도 무쳤다. 시금치 된장국에 시금치나물, 김과 김치뿐이지만 뿌듯했다. 곧 도착할 언니를 기다리며 현관문 앞 좁은 복도를 서성였다.


    언니는 항상 오는 시간에 왔다. 아침마다 전철 기다리는 게 싫다고 매일 동일한 전철 도착 시간에 맞춰 나가는 언니였다. 이제 신발 벗고 막 들어선 언니에게 잠시를 못 참고 설레발을 쳤다. 감춰지지 않는 뿌듯한 표정을 어린아이 마냥 걸고 부엌 한편에 차려놓은 상을 보여줬다. 언니는 금세 표정이 좋지 않다.

    “나 집에서 밥 먹는 거 싫어하는데.”


    오랜 시간 동안 자취를 한 언니는 자기만의 생활 방식이 있었다. 언니에게는 룸메이트들도 많았지만 나처럼 몇 밤 신세 지고 가는 뜨내기들도 많았다.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룰을 정했고 그 룰을 첫날 미리 언지해 주었다. 그래 봤자 언니의 룰은 몇 가지 되지 않았고 그중에 중요한 건 딱 하나, 리모컨은 자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마 집밥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남의 집에서 뜬금없이 밥을 해놓을 거라고 상상하기에 나를 포함한 언니에게 신세 지는 사람들 대부분이 밥을 할 것 같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밥을 할 것 같은 스타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금세 표정이 바뀐 언니처럼 나도 금세 표정이 바뀌었다. 한껏 기대하고 있던 대로 부응받지 못하자 쪼그라들었다. 서운한 한편으로 언니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언니는 그 한 마디를 하고선 금방 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맛있게 먹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번 당부했다.

    “있는 동안 밥 하지 마. 집에서 밥 냄새나는 거 싫어.”


    언니네에서 신세 지는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항상 언니에게 전날 밤 급작스럽게 연락을 하고 다음날 간단한 짐을 싸들고 언니에게로 갔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흔쾌히 나를 받아주었다.



    다음날에도 언니는 역시나 동일한 시간에 출근을 했고 이직 사이에 껴 있던 백수였던 나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언니가 없는 시간 동안은 내가 리모컨의 주인이니까. 아침 드라마, 아침 정보 프로그램 몇 개를 건성으로 보다 보니 아침도 끝나버렸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어제 남은 시금치 된장국과 밥을 떠서 상에 올렸다. 그리고 된장국 옆에 작은 술잔도 하나, 그때 당시 저렴해서 인기였던 전통주도 하나 올려놓았다. (실은 전날 시장에서 전통주도 하나 사 왔다.) 시간 보내기로 점심 겸 낮술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흥미 없는 내용을 보고 있는 시간에 질려 있다가 문득 어제 사온 DVD가 생각났다. 언니가 대체 언제 보고 안 본 건지 티브이와 DVD 플레이어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한참을 낑낑대다가 겨우 틀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준비되었다. 흑백 화면이 시작되었고 나는 영화를 안주 삼아 친구 삼아 술 한 잔, 국 한 술, 술 한 잔, 밥 한 술 뜨기 시작했다. 낮술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잘 들어갔다.


    영화는 고요했고 적막했다. 커튼이 차마 다 막지 못한 서향 창문의 오후 햇볕이 방 안을 붉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였지만 그 온화한 빛깔의 따뜻함조차 쓸쓸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영화와 술에 빠져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홀린 듯이 화면을 보다가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는 게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고되고 단 낮잠을 한소끔 자고 눈을 뜨니 영화가 끝나 있었다. 부스스 술이 덜 깬 몸을 일으켜보니 상 위 술병에는 술이 반은 남아있었고 시금치 된장국이 담겨있던 냄비는 텅 비어 있었다. 안주로 시작해서 해장까지 해버린 모양이었다.



    언니에게 의탁했던 그 몇 날들에 나는 가출 성년이었다. 성년에게 가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출가라고 하기에는 그리 거창한 것도 고정적인 것도 아니라 나도 남들도 그걸 가출이라 불렀다. 한 번씩 폭발하는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함께 폭발하려는 나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엄마가 허락한 가출. 그럴 때마다 나는 리모컨만 함부로 손에 쥐지 않으면 언제나 나를 받아주는 언니에게 달려갔다. 언니는 나를 쉽게 위로하지 않았고 별 말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고 혼자 사는 방법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술병에 남은 술만큼이나 남았던 영화를 놔둔 채 잠든 이후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다시 본 적이 없다. 그 DVD는 아직 언니 집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곧,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