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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Oct 03. 2020

케이크,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악몽

크게 틀어놓은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 소리도, 못지않게 볼륨이 커져 있는 엄마와 오빠들의 이야기 소리도 뚫고 방 안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 모여 저녁 디저트로 케이크를 각자 접시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대화를 끊고 싶지 않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받았다. 낯선 목소리의 남자였다. 술에 잔뜩 꼴은 목소리였다. 누가 이렇게 술이 잔뜩 취해서 전화를 했을까 싶어 웃음이 터졌다. 누구야?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두서없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누구일까.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던 시절의 일이었다. 친한 남자 선배, 동기, 후배를 떠올려 보아도 생각 나는 목소리가 없었다.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 이렇게 대꾸한다. 어떻게 나를 모를 수 있어, 내가 네 첫 남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화난 목소리로 나를 추궁하더니 자기 상상 속의 일이 현실인 것처럼 나와의 성적인 일화들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방문 밖에서는 여전히 엄마와 오빠들의 웃음소리가 티브이 소리를 배경으로 들리고 창문 밖에서는 포슬포슬 눈까지 내려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만들고 있었다. 듣고 있는 이야기가 정말 그런 이야기가 맞나 실감이 안 났다. 맘껏 기분을 풀고 늘어져 있다가 기습을 당한 것 같았다. 내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남자의 목소리도, 엄마와 오빠들의 목소리도 멀어졌다. 심장 소리가 내 몸을 북으로 삼은 듯 점점 크게 울렸다. 쿵쿵. 북소리와 함께 뱃속에서부터 울컥울컥 올라오는 불구덩이가 가슴에서 턱, 목구멍에서 턱 막혀 버렸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걸까. 입은 벌어져 있지만 무엇 하나 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몸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나를 삼키려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화를 끊는 것뿐이었다.


    솟구치는 감정을 주워 넣지도 못한 채 방을 뛰쳐나왔다. 커튼을 젖혀 놓은 거실의 큰 창문 밖으로 눈이 속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엄마와 오빠들은 상처 한 번 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웃고 있었다. 그들의 공간 속에 쉽사리 뛰어들지 못하고 엉거주춤 어색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뭐해, 통화 끝났어?”

    엄마의 말이 주문이 되어 풀려난 나는 엄마 옆에 바싹 가 앉았다. 할 말을 골라 본다.

    “좀... 전에, 이상한 전화가 왔는데... 어떤 나, 남자가 나한테 이상,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나랑 자기가...”

    오빠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나 대신 남자를 잡아다가 혼쭐을 내주는 상상을 그 짧은 순간에 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디까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내 말은 전혀 그들에게 가 닿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몇 마디 물어보는 게 그만이었다. 장난전화였나 보다 하는 걸까. 다시들 이어나가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포크를 바삐 놀려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들의 표정은 내 말을 이해 못해서 별일 아닌 일이 된 건지 정말 별일 아닌 일이어서 별일 아닌 일이 된 건지 나를 헷갈리게 했다. 나는 가라앉지 못한 화를 끌어안고 입을 봉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내가 겪은 일을 이해할 사람이 필요했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자친구는 미친놈이네, 그냥 막 전화한 거 아니야?라고 할 뿐 그다지 놀라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 남자가 정확히 내 이름과 학교 이야기까지 다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해도 누군지 모르겠어?라고 내게 묻는 게 다였다. 잡아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내 으르렁에 그걸 어떻게 잡아, 심드렁이었다. 김이 빠졌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이제는 조금 차분해진 나보다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어떤 미친 새끼냐며 여기 옮기지 못할 거침없는 욕을 시원하게 날려줬다. 친구의 흥분에 그제야 위로받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후보자를 추리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연관이 있을 만한 남자가 누구일까. 자기가 첫 남자라며 나에 대한 소유권(?)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유세를 떨며 개소리를 하던 남자가 누구일까. 조금이라도 내가 여지를 준 남자 중에 있을까. 어느새 나는 자기 검열을 하며 돌아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행동이라도 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라는, 남자의 개소리에 맞는 똥 같은 생각(개와 똥을 비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더 어울리는 말을 찾지 못했다).


    얻은 것은 없었다. 어떤 후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입으로 내뱉을 만한 사람과 내가 아는 사이라는 게 상상도 되지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감추고 사는 사람을 찾아낼 만큼의 공력도 없었다. 괜스레 자아반성과 자기 비하의 시간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다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그 입 다물라고, 이름도 밝히지 못하는 주제에 비겁하게 숨어서 헛소리하지 말라고, 왜 말을 하지 못했을까. 공격이 들어오면 배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는데 그런 성격이거나 말거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 내 생일 케이크를 먹으며 평온하게 지나가는 우리 집 크리스마스의 밤은 여전히 평온했고, 나는 나를 부르는 엄마에게 대답하며 다시 나가 그 분위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 일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잊어가며 살았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그다지 관심 없는데 또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날도 아버지는 어딘가를 가 있었고 엄마와 오빠들과 나는 또 어디 나가지도 않고 붙어 있었다. 오빠들은 어렸을 적 부모님이 생일이라고 케이크 한 번 사준 적이 없는 게 안타까웠는지 어른이 되고부터 서로의 생일에 케이크를 사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붙어 있는 내 생일이 되면 매년 ‘X-mas'라고 장식되어 있는 케이크와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주는 상품을 내게 주었다. 겸연쩍게 막내 여동생이라고 더 챙겨주고 싶었는지 촛불도 노래도 선물도 준비해 주었다. 그 마음이 아직 서로에게 남아있을 이틀 후의 크리스마스. 그날도 저녁을 먹고 오빠들이 사 온 케이크를 꺼내 왔다.


    그리고 내 방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촉이라는 게 발동했다. 마음을 준비시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걸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있을까. 느낌의 종류지만 남달리 ‘촉’이라는 이름을 획득한, 누구나 가끔은 나타나는, 그리고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이놈의 촉. 그 남자였다. 역시나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남자가 서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오늘은 아니다. 너의 개소리를 들어줄 마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바로 말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남자가 미처 몰랐을 나의 본성을 보여주었다. 한 오 분은 쉬지 않고 말한 것 같다. 내가 아는 온갖 격한 욕들을 곁들어 내일부터 너에게 취해질 액션들에 대해, 작년과 지금의 행동을 어떻게 처절하게 후회하게 만들어줄지에 대해 숨 쉴 틈도 없이 전달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속이 조금은 시원했다. 올해도 전화를 걸어줘서 고마운 기분까지 들었다.

 

   상기된 얼굴로 다시 엄마와 오빠들이 있는 거실로 나왔다. 후련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에 걸려왔던 전화가 또 왔다고, 이상한 남자가 나에게 이상한 말을 해댔다고. 이번에도 내 말은 전달이 되지 않은 듯하다. 아니면 무슨 말을,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을까. 정말 별일이 아닌 걸까, 신경을 쓰지 않는 걸까. 서운해지려는 마음을 덮고 그냥 거기까지 이야기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도 떠들썩한 대화에 참여했다. 먹다 내려놓은 케이크를 먹으면서.


    물론 나의 말들은 하지 않을 협박이었다. 내가 말한 액션들을 취해봤자 경찰도 통신사도 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남자에게는 먹혔나 보다. 그다음 크리스마스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케이크를 먹는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방 안에서 울리던 벨소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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