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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Oct 29. 2020

아메리칸 조식, 여름밤에는 곱창전골을 가야 한다

바람이 살랑살랑 다리를 간질이는 여름밤에는 원피스를 입고 나서야 한다. 그런 밤이다. 남자친구와 밤 열 시가 다 되어서 집을 나섰다. 둘이 손을 잡고 여름밤이 깰까 조심조심 이야기하며 나서는 길목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그 길을 거슬러 좀 더 전철역 쪽으로 걸어간다.


    몇 번 길을 꺾어 코너를 돌면 반가운 <곱창전골>이 나온다. 나는 곱창전골을 먹을 줄 모른다. 먹어본 적도, 남이 먹는 걸 본 적도 없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 <곱창전골>을 사랑한다.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자 의자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여름밤보다 어둑어둑한 가게 안은 색색의 조명이 즐비하지만 그 조명들은 그다지 어둠을 밝힐 생각이 없다. 쿵쿵 더위와는 상관없는 순간의 열기가 느껴진다.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급속도로 기분이 올라간다. 언제나 앉는 바 자리에 남자친구와 나란히 앉아 사장님에게 소주와 아메리칸 조식을 주문한다. 이곳은 <곱창전골>이지만 곱창전골을 팔지 않는다. 아메리칸 조식을 판다.


    LP를 틀어주는 술집을 좋아한다. 팝과 가요 둘 다 좋아하는 나와 달리 팝은 별로, 가요만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가기 좋은 곳이 이곳이었다. 이곳은 주로 80, 90년대 가요를 틀어주는 LP바다.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 사장님에게 건네면 거의 웬만한 노래는 다 틀어준다. 역시 벽면 빼곡하게 꽂혀 있는 LP들의 수가 어마하긴 한가 보다.


    술집이든 식당이든 메뉴판 탐독과 새로운 메뉴 도전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 집에서만은 예외다. 진짜 아메리칸들은 어떤 아침을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메리칸들의 아침을 소주 안주로 시킨다. 이상할 것 같지만 요상하게도 어울린다. 소주 안주로 찌개나 고기보다 과일이나 채소류가 더 좋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정말 과일 안주나 샐러드만 시켜 먹어본 적은 없다. 그러면 영 마음이 좋지 않다. 어떻게 그것만 놓고 먹을 수 있지. 술 마시는 재미의 반 이상은 안주 먹는 재미인데. 그런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아메리칸 조식. “베이컨, 감자튀김, 샐러드, 크래커, 계란후라이가 한 접시에-”라고 메뉴판에 친절하게 써져 있는 설명처럼 원 플레이트 속에 내가 원하는 샐러드도, 그것만 먹으면 까칠해질 거야 반항할 마음도 달래줄 기름 지글지글과 탄수화물도 함께 섞여 있다. 아메리칸도 조식도 아니지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소주 한 잔 한 잔에 샐러드도, 베이컨도, 톡 터져버린 달걀노른자도 입에 차근차근 넣는다.


    남자친구는 밤 10시에 먹는 아침보다는 음악에 빠져 있다. 바 앞에 앉아 함께 이야기 나누다가 잔 한 번씩 짠 부딪히던 사장님에게 신청곡을 적은 쪽지를 건넨다. 한두 곡 지나고 남자친구가 신청한 노래가 나온다. 역시 이 노래만큼 전주의 울림이 큰 노래는 없나 보다.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의 시작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가 잔잔히 퍼지면, 노랫소리를 따라잡느라 목소리가 커진 사람들의 볼륨이 잦아진다. 첫 소절을 따라 부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어제는~” 내 마음만이 아닌 게 분명하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 목소리가 모아진다. 다 같이 떼창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고 누군가는 눈길을 던지며 노래 부른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서로를 날서게 하는 타인의 낯선 표정이 사라진다. 우리 모두가 동행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것 봐, ‘우리’라고 성급히 말을 붙였다.


    이제 벽면 한가득 LP가 가득한 곱창전골은 가지 못하지만 남자친구는 여전히 술을 마시면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핸드폰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해 좋아하는 음악을 튼다. 역시 “별이 진다네”는 빠지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면 한껏 기분에 취해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목청껏 후렴구를 따라 부르고 있으면 함께 떼창 해주던 군중들 대신 아이가 방에서 뛰어나와 소리 지른다. “아빠! 아빠 웃겨! 아빠 노래 못 불러!”라며 깔깔도 웃는다. 


    나와 남편에게는 추억 속 이야기지만 아직 <곱창전골>은 성업 중이다. 내가 다니던 시절 이후에 이사를 했고 시간이 지난 만큼 예전과는 다른 모습, 다른 분위기일 것이다. 그래도 바람이 살랑이는 여름밤이면 떠오르는 <곱창전골>에서는 아직 아메리칸 조식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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