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에 늦는 걸 싫어하는 우리답게 예약한 정시에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크기가 컸고 생각 보다 손님이 많았다. 프랑스 요리를 먹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런치 코스를 시키고 남편이 맛있으면 다음에 또 오자, 분위기 좋네,라고 말하는 데에다 대고 “이 돈이면 우리 좋아하는 제주 고기 사 먹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분위기 깨는 절약 코스프레 아줌마가 되었다.
코스 요리 텀이 길었다. 대화하느라 음식은 간간히 집어먹는 다른 테이블들과 달리 우리는 음식이 나오면 음식에 집중하는, 음식을 위하는 그래서 순식간에 다 해치워버리는 인간들이라 그런 건지, 오랜 시간 동안 정찬을 즐긴다는 프랑스식이라 늦게 나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진짜 주문량을 소화 못해서 늦게 나오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할 만하면 한 번씩 음식이 나왔다.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다. 우리는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는다. 모르고 지나간 적도 여러 번일 정도다. 기념일인 걸 알아봤자 저녁에 우리가 좋아하는 제주 고기를 배달시켜먹는 정도랄까. 그냥 술 마시고 좋아하는 음식 시켜먹을 건수가 생기는 날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데 이번 기념일에는 프랑스 요리도 사 먹고 다 먹고 나면 꽃도 사러 가기로 했다. 10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의미가 큰가 보다.
남편은 답지 않게 코스의 중간중간마다 10주년의 소회를 밝혔다. 그동안 잘 살았다고, 고생했다고. 나는 그냥 어, 당신도 고생했네, 낯부끄러워하며 한 마디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잘 산 걸까, 고생한 걸까. 언제 시간이 이렇게 간 걸까. 그나마 아이 나이를 보며 세월을 세어보았을 뿐,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다.
남편과 기념일을 챙겨본 것은 연애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었다.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그 당시로 정말 큰돈이었던 거금 십만 원을 들여 그때 당시 핫했던 랍스터(자신은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환장하는)를 사주었다. 어지간한 일은 다 까먹어 버리고 마는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돈맛이 좋긴 좋은가 보다. 그리고 어딘가로 가서 특별한 외식을 하는 것이 좋긴 좋은가 보다. 그러면 이번 기념일도 앞으로 몇 천일이 지나도 기억이 날 듯 싶다.
쉬어가는 코스 중간에 남편에게 그날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그때 이후로 우리 이런 기념일 처음이라고 말하면서. 남편은 그때 정말 큰 마음먹고 사준 거라고 말했다. 1000일이라니, 남편은 그것밖에 안되었는데 기념일이라고 그런 걸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별로 안되었을 때네, 한다. 듣고 보니 정말 까마득한 옛일이다. 남들은 1년만 사귀어도 오래 사귀었다 할 20대여서인지 그때는 정말 오래 사귄 느낌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가소로운 숫자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은 얼마나 지났을까. 심심풀이로-음식은 안 나오고 할 이야기도 떨어졌고 해서- 기념일 계산기를 찾아 계산해 보았다. 허걱. 7961일. 우리가 좋아하고 만난 지가 벌써 곧 있으면 8000일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 보니 우리가 만나기 전 산 세월보다 우리가 만나고 지낸 세월이 곧 있으면 길어진다는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우리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은 것 같지 않은데 8000이라는 숫자를 보니 느낌이 덜컥 왔다. 괜히 우리가 노부부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좋아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싸우고 그사이 많이 마시고 많이 먹고 많이 뽀뽀하고 많이 이야기하며 지낸 세월. 거기에 결혼을 하고 고양이들을 만나고 아픈 고양이 병간호에, 사고 치는 고양이 뒤치다꺼리를 하고 아기를 낳아 어린이로 만든 세월을 얹으니 8000일이 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분명 나도 남편도 있다. 결혼 후 10년의 주인공은 온통 아이와 고양이 같지만 말이다. 그 사이에도 우리는 연애 때처럼 여전히 많이 마시고 많이 먹고 많이 이야기하고 살았다. 뽀뽀는 예전만 못하지만 말이다. 종종 여행을 다녀왔고 간혹 다투기도 했다. 그래도 보통은 별 일이 없는 잔잔한 10년을 보냈다. 내가 원하던 10년이었다. 어찌 보면 내가 바라는 부부 생활은 노부부의 생활인지도 모른다. 폭풍이 치는 파도 같았던 엄마와 아버지의 부부 생활만 보아오던 내게 잔잔한 물결 같은 지금의 부부 생활은 낯설지만 익숙해져 버린 모습이다. 이렇게 8000일의 일을 해내 왔다.
분명 남편이 꽃을 사주기로 했는데 꽃집에 도착하니 나보고 사라며 자기는 로또를 산다고 사라졌다. 골똘히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꽃을 고르고 계산하려는 찰나 남편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아저씨는 새로운 손님인가 했다가 남편이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일행이라고 하자 왜인지 모르게 기분 좋아하며 “일행이면 서비스 줘야지, 여기!”하며 장미꽃을 반 단이나 얹어 주었다. 얼떨떨해하며 장미꽃을 받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올라갔다. 괜히 갑자기 남편이 1000일의 남자친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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