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매]
상대에 대한 애정이 깊을수록, 다정한 침묵은 늘 어렵다.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동생이 까맣게 타서 왔다. 성인이 되고 떠난 첫 여행이었다. 현관에 짐 가방을 내려놓는 동생의 표정은 마치 삼색 나물을 담아놓은 그릇 같았다. 여행의 즐거움과 여행 후의 피곤함,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묘한 무엇까지. 앞의 두 개까지만 예상했는데 마지막 저건 뭘까. 동생이 씻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내가 잘 놀다 왔냐고 물으니 동생도 잘 놀다 왔다고 한다. 다짜고짜 이렇게 물으면 저렇게 뭉뚱그린 답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구나 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궁금한 것이 있다고 이쪽에서 열을 내며 다가가면 동생은 오히려 입을 다문다. 꼬치꼬치 캐묻거나 집요하게 파고들면 하려던 말도 도로 삼키는 아이였다. 그래서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한동안 휴대전화만 들여다봤다. 같이 있지만 서로의 영역을 갖고, 각자 다른 일을 하지만 말을 하면 대꾸를 할 수 있는 거리에서. 그리고 잠시 후, 시선은 화면에 둔 동생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 뭘 먹었는지. 어딜 갔고, 무엇이 좋았는지. 나는 추임새를 넣으며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즐거운 일이 생겼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왔다면 그것을 듣는 것이 가족의 권리고, 스스로 꺼내지 않았다면 먼저 물어보는 것이 가족의 의무니까. 그런데 휴대전화 사진을 한 장씩 넘기던 동생이 문득 화면을 끄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금세 뭐라 할 듯한 몸짓치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기다리지 못한 내가 먼저 물으려는 찰나, 다행히 동생이 입을 열었다. 가벼운 듯한 어조였으나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고, 그리 시작된 이야기는 대략 삼십 분 정도 진행되었다.
이만큼 진지하고 긴 하소연을 들은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갓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이 처음으로 충돌하고 부대낀 이야기였고 내가 지금껏 수없이 경험하고 부딪혔던 문제와 같은 맥락이었다. 듣자마자 무엇이 갈등의 원인인지, 사건 관계자 중에 누가 조금 더 잘못했는지,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했는지, 그런 것들이 연달아 떠오르면서 상황은 금세 파악됐다. 하지만 속으로 계속 되뇌었던 것은 ‘앞서가지 말자’였다.
그래서 별 다른 말없이 끝까지 다 들었다. 막상 이야기가 끝나면 매번 이렇다. 대화 도중에는 말허리를 잘라서라도 하고 싶은 말이 한 보따리인데, 말을 끊지 않고 전부 듣고 나면 할 수 있는 말은 한 줌뿐이고, 그중 꼭 해야 하는 말은 한 스푼 정도만 남는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많이 속상했겠네’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내가 생각한 정답을 말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생도 내 생각이 어떤지 묻지 않았다.
띠동갑쯤의 동생은 마냥 동생 같지만은 않다. 세상에 없던 아이가 생기는 것을 봤고, 그 자라나는 모습을 전부 지켜봤고, 아이의 정서적 교육을 담당하는 동안 동생이면서 자식처럼 느끼는 복합적인 관계가 됐다. 그래서일까. 애정이 많을수록 마음이 앞선다. 묻지도 않은 것을 미리 말해주고,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과한 언행 때문에 늘 하소연과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그것을 할 시간과 기회를 뺏어왔었다. 상대가 내 욕심을 거부하면 서운해 했고, 그것이 반복되면 나는 상대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상대는 내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며 지레 관계를 포기하려 했다. 마치 내 생각은 종종 틀릴 수 있으나 내 의도만은 언제나 순수해,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너는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해, 이런 식으로. 충분히 털지 않는 흙발로 남의 머릿속과 마음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상대에게 부담이라는 것을 외면하면서.
어른은 어른이다. 아이가 아니듯이. 똑같이 아이는 아이지 아직 어른이 아닌데 나는 종종 그 당연함을 잊고 산다. 조금 더 산 사람으로서, 이미 경험한 이로서 아직 부족한 아이가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는 것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뭐든 과하면 모자람만도 못한 법인데. 아는 것이 마냥 능사는 아니었다. 말해주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었다. 침묵도 때로는 훌륭한 언사가 된다. 때로는 조금 멀리 돌아온다 해도 기다림으로 스스로에게 생각할 여유와 기회를 주는 것. 내 욕심에 이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 참아야 하는 순간임을 알고 그것을 참는 일은 내가 누군가의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느끼고 배워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나는 너의 끝나지 않을 푸른 봄을 지켜주는 웃사람이고 싶다. 청춘이 시들고 젊음은 고여 가는 요즘에 아직 청춘인 어른으로서 너의 시대에 해줄 수 있는 일은 곧 청춘일, 또는 지금 청춘인 네가 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일 것이다. 애써 어른인 척 하지 않아도 숨 쉴 수 있고, 보다 즐거워질 기회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게. 그래야 내가 올바른 어른일 테고, 그래야만 나 역시 청춘이 된다.
너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 나의 안위를 위해 너의 꿈을 빼앗지 않는 사람. 삿된 부정을 세습시키지 않고 정도를 알려주는 사람. 삶의 방식이 서로 달라도 인간적으로 존중할 수 있는 사람. 모든 행복은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래야 나는 너에게 어른이 된다. 단지 일찍 태어나서가 아니라, 내 의무로 너의 권리를 지킬 수 있어야만 그제야 자격이 생긴다. 손에 제 욕심을 쥐고 입으로 고민 없는 말똥을 뱉어도 어쨌든 나이를 들이마셨다는 이유만으로 대접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더 다정할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너의 가족으로서 자상하면서 다정할 방법이 무엇일지, 내가 아닌 너를 보며 늘 고민하고 실천할 것이다. 너보다 먼저 태어난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 한국수필 202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