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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얻어낸 나에게

[14매]

by 이한얼






22시 50분.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에 나는 으레 이곳에 있다. 하지만 몇 시간째 하얀 공백과 마주하고 앉아도 쓸 말이 마땅치 않다. 생각은 많은데 언어로 풀어지는 것은 없고, 애써 파고 들어가 무엇인가를 들고 나오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비단 지금뿐만 아니라 요새 계속 그렇다. 우연찮게 강물 위로 떨어진 낙엽처럼, 나는 오늘 그저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배가 고플 때 먹었고 졸리면 잤다. 오늘 해야 할 일과 하기로 했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나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하루를 채웠다. 서른 개 가량의 담배를 태웠고, 윗집과 잠시 트러블이 있었으며, 다섯 개의 TV 프로그램을 보고, 동생과 짧은 수다를 떨었다. 커피를 내리고 얼음을 씹으며 어떤 이와 조금 긴 수다도 떨었다. 비가 내린 흔적이 있어서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들어가서 우산을 두고 다시 나와도 되는데 나는 그냥 액세서리처럼 그것을 들고 나왔다. 햇살이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었다. 반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데, 그 누군가가 그리웠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꾸준히 흘러가고 아침에 뜬 눈은 지는 해와 함께 침잠한다. 나는 또 하루만큼 늙었다. 오늘만큼은 내가 살아간 건지 죽어간 건지 따지고 싶지 않다. 하루쯤이야 아무려면 어떻겠나. 죽어버린 것만 아니라면 최악은 피한 셈이다. 차악은 차선과 결국 한 끝 차이 같으니까.

시간은 다시 23시 20분, 역 근처 카페. 사회에서 정한 오늘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정이 되어 내일로 넘어가면 나는 풀어놨던 짐을 정리하여 이곳을 나갈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씩 찍어 누르듯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올라갈 것이다. 틀어놓고 들리지도 않을 노래 옆에는 빙빙 돌아가는 형광 주황색의 우산이 있을 테고. 집으로 돌아가는 15분의 시간 동안, 어쩌면 운이 좋다면 나 홀로 짧은 여행을 즐길 수도 있겠다. 구름을 징검다리 삼아 별과 별 사이를 뛰어넘다보면 내가 바라는 그곳의 풍경이 얼핏 눈이 스칠지도 모르지. 비온 뒤의 언덕길은 미끄러우니 훌쭉한 달에 동아줄을 하나 매달아놔도 좋겠다. 미끄러져 다치는 것보다 의도치 않은 강제적인 여행 종료가 더 아프니까. 그 걸음이 끝났을 때 바라던 곳에 내려서지 못해도 괜찮다. 비가 남긴 잔물이 사방을 반짝이는 풍경만으로도 오늘을 위로받고 내일을 힘낼 수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사방의 전경이 보이는 높은 난간 앞에 내려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점점 줄어드는 담배는 두 세계 사이의 내 위치와도 같다. 마치 스페이스 바에 밀려나는 커서처럼, 이상과 한껏 가까워진 나를 현실 쪽으로 밀어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끝까지 밀려난 커서가 아래 칸으로 떨어지듯, 나를 왔던 곳에 도로 내려놓을 것이다. 그러면 혼자만의 짧은 여행은 없던 것처럼 조용히 끝이 난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즐겁다. 과거를 반추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종종 그것이 괴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상상과 반추한 그곳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려볼 뿐, 들어갈 수는 없다.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에 나는 빠져있다. 나와 비슷한 대리인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23시 33분. 나는 십 분 동안 한 장을 썼고, 그 다음 십 분 동안 다시 한 장을 더 적어낸다. 지금 내게 있어서의 이십 분은 여백 두 페이지를 채워 넣는 시간. 다음 이십 분은 오늘 하루를 정리하여 내게 수렴하는 시간이고, 그 다음 이십 분은 아까 말한 야간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그리고 그 다음 이십 분. 그리고 또 이십 분. 나는 서로 바짝 붙어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하루를 살고 있다. 간혹 비어있는 곳도 있고, 두 개가 위로 겹쳐있는 곳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유동적으로 두 칸을 뛰어넘기도 하고 제자리에 오래 서있기도 한다. 그렇게 냇가를 건너면 오늘 내게 주어진 소명도 끝. 내일 다시 건너온 다리를 건널지, 아니면 다른 다리에 올라설지 그건 아직 알 수가 없지만 중요한 건 계속 멈춰있지 않은 것. 걷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 다른 말로, 살아가는 것.

내 삶은 지극히 단출하다. 앞으로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주변에 뿌리고, 동시에 뿌리고 난 빈손으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무엇을 잡아챈다. 그것뿐이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두 가지의 단순한 그 행동만으로 나는 웃고 즐기고 느끼며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안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불가는 없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결핍도 없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그것을 하는 과정’에 속하니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얻는 과정’의 시작이다. 행위의 과정은 두 가지로 양분된다. 시작했는지, 시작하지 않았는지. 그와 연결된 결과의 위치 역시 두 가지로 수렴된다. 하고 있는지, 포기했는지. 결국 그것을 얻었는지는 그 일련에 포함되지 않는, 추후의 문제이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결국은 얻게 될 것이고, 하고 있지 않다면 무슨 방법으로도 얻지 못할 것이다. 얻지 못한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것도 아니다. 아직 얻지 못한 것이고,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다. 주변의 상황도, 누구의 훼방도 상관없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동선 안에는 나와, 길과, 그리고 의지. 이 셋뿐이다.

한 페이지를 더 채워 넣는 것으로 다시 이십 분을 보냈다. 건너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십 분 전 내가 밟은 곳이 두 개의 징검돌이 겹쳐있는 곳이었나 보다. 이래서 재밌다. 한치 앞이라도 건너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저 자리에 갔을 때 반드시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일 하루를 살아낼 이유가 충분하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또 살고 있다.

오늘 하루 고생했다. 수고가 많았다. 빠르든 느리든 나는 걸었고, 그래서 이곳에 도착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오늘 밤 쉴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꿈에서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같다. 언젠가 이 여정이 끝나는 그 날, 후회 적은 삶이 될 수 있기를.




- 창작산맥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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