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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에 발코니가 있다

[15매]

by 이한얼






초겨울 어느 날, 발코니 실외기 옆에서 너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너는 왠지 추워보였다. 자연스레 빌라 옆 풀이 우거진 공터로 시선이 갔다. 네 고향은 아무래도 저기 같은데, 어쩌다 여기 주택 꼭대기까지 올라왔을까.

내가 동물, 식물, 인간 등 타생물을 처음 대할 때의 기준은 상대가 내 영역에 침입하여 삶을 방해하는가, 또는 나를 공격하는가, 이 두 가지뿐이다. 이번 경우는 둘 다 가위표가 쳐졌다. 그렇다면 너는 적이 아닌 공생자다. 곤충 중에서도 바퀴벌레나 모기가 아니라 벌이나 거미와 같다. 그렇다면 공격 받기 전까지는 너를 공격하지 않을 거고, 방해받기 전까지는 네 삶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고 그 방식 역시 제각각이니. 내가 무언가를 피해 서울에서 거제로 도망쳐왔듯이 너 역시 너만의 이유로 지금 거기 있는 거겠지. 그럼 볼일 보고 갈길 가시게. 그렇게 집으로 들어온 나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발코니에 사마귀가 있다’라고 한 줄 적어놓는 것으로 너와의 조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담배를 피우러 다시 나간 발코니에서 또 너를 만났다. 왜 아직 여기 있어? 너는 자리뿐만 아니라 자세도 달랐다. 당당하게 서있던 어제와 달리 앞발을 곱게 모으고 드러누워 있었다. 왠지 힘이 없는 듯 보였고 어쩌면 지쳐 쓰러진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못 내려가는 거야? 도움이 필요해? 말이라도 통하면 쉬울 텐데. 1분쯤 쪼그려서 지켜봤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지레짐작으로 개입 좀 하자. 나는 반으로 자른 페트병을 들고 나왔다. 페트병 입구를 근처로 갖다 대자 너는 그제야 머리를 들고 앞발을 움직였다. 움직이면 다쳐, 가만히 있어. 너를 담은 페트병을 한 손에 든 나는 현관을 나섰다. 집으로 가자. 어쩌다 이 멀리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집에 가자. 너도 나도, 아무리 멀리 떠나왔어도 모두 언젠가는 돌아가야지. 나는 독백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왜 페트병을 깊게 자르지 않았을까.

내려갈 때마다 복도 센서등이 하나씩 켜지며 어둡던 층계를 밝혔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문득 들고 있던 페트병에 시선이 갔다.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모르겠지만 너는 미끄러운 페트병 내부를 타고 올라와 내 손톱 위에 앞발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공격당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었다. 단지 놀란 것이다. (그래서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반사적’이라는 단어를 쓴다) 붙잡고 있던 손톱을 놓친 너는 통 안이 아닌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120cm의 높이에서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는 그대로 굳었고, 너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을 밝히던 조명은 금세 꺼졌다. 나는 손만 휘저어 등을 키고 발밑을 살폈다. 너는 여전히 계단 위에 누워있었다. 곤충은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개미는 빌딩에서 떨어져도 멀쩡히 착지한다고 했는데. 걱정과 두려움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다행히 너는 금세 움직였다. 고개를 들고 앞발로 바닥을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안도감이 썰물처럼 퍼져나갔다. 다행이다. 미안해, 내가 너무 놀라서. 손을 털면 다시 통 안으로 떨어질 줄 알았어. 변명을 주억거리던 나는 곧 말을 멈췄다. 네 개의 뒷다리 중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대로 잠시 있었다. 조명이 꺼지면 손을 휘둘러 다시 켜고, 도로 꺼지면 다시 켜면서. 나는 왜 페트병을 더 깊게 자르지 않았을까. 집에 수없이 굴러다니는 종이로 뚜껑 하나 덮지 않고. 순간 놀랐어도 참았으면 되잖아. 아니면 앞발을 조심스럽게 밀어서 너를 안으로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네 다리는 부러졌을까 아니면 잠시 마비된 걸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을 수 있을까. 만약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지, 고향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나. 움직이는 나머지 다리와 멀쩡한 앞발만 가지고 사냥감을 잡거나 천적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짧게 쪼개진 상념이 연달아 밀려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원래의 기준대로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나. 내가 공격받기 전까지는 너를 무시하고 제 길을 가도록 방관했어야 했을까. 네가 그대로 얼어 죽었다면 너를 발견하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 죄책감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어쩌면 혼자 올라온 것처럼 혼자 내려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지쳐 쓰러진 것이 아니라 잠시 쉬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사마귀 종이 원래 해질녘 무렵에 잠을 자는 습성일 수도 있는데. 너의 생태도 모른 채 순간의 짧은 판단으로 책임을 동반하지 않은 힘을 함부로 부린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선의로 한 일이 너에게 악의가 되었구나. 정의라고 뻗은 내 의지가 너에게는 불의였구나.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그보다 간절히 변명하고 싶었다. 본의가 아니었다고. 도울 의도였다고.

그대로 얼마가 더 흘렀다. 나는 손을 휘저어 다시 센서등을 켜고 너를 페트병 안으로 옮겼다. 너의 다리 하나는 여전히 늘어져있었다. 두 손으로 받쳐 든 페트병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페트병을 품에 안은 채 고향일 거라고 짐작한 풀밭 앞에 섰다. 산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수록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한동안 하늘을 보던 나는 무성한 풀잎 어딘가에 너를 내려놓았다. 정확히 말하면, 너를 버리고 자리를 떴다.

그렇게 나는 내가 품지 못한 너에 대한 모든 것, 선의, 의도, 실수, 후회, 고민으로부터 도망쳤다. 나는 네 다리를 고치려고 하지도 않았고, 너를 기르며 상태를 지켜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버리는 것으로 감당하기 싫은 감정을 외면했고, 노을이 사라지는 하늘을 보며 죄책감을 무마했고, 돌아서는 것으로 네 존재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삼 개월이 지나 일기장 한 구석에서 ‘발코니에 사마귀가 있다’라는 한 줄을 보기 전까지 이 일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아직까지도 너를 떠올리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때 왜 너를 쉽게 내버렸을까. 기능을 훼손하고 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여겼을 때 생명을 물건으로 치부하며 버리는 것 말고 다른 답은 없었을까. 너를 공생자로 대한다 했는데 너를 내버린 내게 너는 진정 그것이었나. 아니었다면, 그럼 나는 누군가의 공생자일 수 있을까.




- 수필 오디세이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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