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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15매]

by 이한얼






가족은 무엇일까.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는 이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 울타리 안에서 그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것마저 잊어버리며 점점 모르게 되지 않을까.


언제 처음 이것을 고민했을까. 아마 열아홉 그 언저리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너무 당연해서 익숙했던 첫 번째 사회집단인데 어느 순간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는데, 어느 누구 하나 빠트리지 않고 소중한데 왜 그 정의는 점점 흐려질까. 어째서 거리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상대의 말과 행동에 크게 상처 받고, 외면하고 싶지만 밀어낼 수 없어서 밤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새벽이 되도록 집에 가기 싫어서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리며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동거인, 식구, 혈연이라는 덮개에 가려 정작 중요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좋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나는 하루하루 꾸준히 그들을 미워하는 중인데, 내 상처는 점점 골이 깊어져 흉이 지고 끝내 한이 되고 있는데, 나는 어떡해야 할까.

결국 어느 것도 풀어내지 못한 채 분가를 했다. 첫 해는 작은 반도 안에서 가장 멀리, 다음 해는 1시간 거리, 그리고 올해는 같은 동네로. 그렇게 3년째가 되었다. 한동안은 연고지 없는 먼 곳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숨어 지냈다. 내 일상에 바뀐 점은 사람 대신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이 붙었을 뿐. 사랑만 하고 싶다. 가까운 이를 미워하기엔 삶은 너무 짧다. 비슷한 내용의 일기만 꾸준히 쌓이며 1년이 지났다.

시간은 거저 가지 않는지 그러는 동안 내가 가진 가족의 정의는 조금씩 달라졌다. 젖은 섬유처럼 낱낱이 풀어 헤쳐지고 다시 씨줄과 날줄로 조금씩 엮이기 시작했다. 나무 밑동을 붙잡고 숲을 볼 수 없듯이 그 자리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나 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섬에서 내륙 도시로 이사한 후에 나는 종종 예전 사진을 보곤 했다. 삼십 몇 년 길지 않은 시간인데 어느 지점을 들춰봐도 가족은 매번 비슷해 보이나 같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그러던 문득 묘한 패턴을 느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은 늘 같은 모습이다. 반면 내가 미워하는 가족은 늘 다른 모습이다. 정확히는, 선이 아니라 점이다. 원래 상대의 모습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 순간의 상대 모습이다. 같이 살 때는 내게 상처를 주고 있는 상대만 봤다. 그게 상대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실상은 길고 긴 상대의 삶에서 어느 짧은 순간일 뿐이었는데. 전체와 일부를 동일시했구나. 그러니 헷갈리고 어려웠구나. 내내 덮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가족의 본의가 거리를 두고 밖과 안을 오가는 동안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족의 완성은 가족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 해체된 직후이다. 몇 사람이 묶이고 누군가가 태어나서 가족이라는 딱지를 붙였든, 가족이고 싶은 관계와 아직 가족이 되지 못했든, 진짜 가족이 되는 과정은 언젠가 무사히 해체되는 날까지 어떻게 얼마나 잘 서로를 끌어안을지. 이것은 이별이 목표인 과정은 아니지만 이별이 목적인 과정이기는 하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한 길은 아니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한 길이기는 하다.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승점이 아닌 반환점인 셈이다. 가족의 무사한 해체는 이전 가족이 완성되었다는 증거이자 동시에 새로운 가족이 탄생했다는 신호가 된다. 예전 그 당시 상대가 나를 놔버렸다면, 혹은 내가 그들을 밀어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무사한 해체를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과정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마음은 새로워진다. 지금까지처럼 헤어짐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막연히, 어떻게든 잘 지내려는 마음이 아닌 언제고 반드시 올 해체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마음이어야 한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철길을 하나씩 깔며 나아가는 것이 아닌 전체 틀에서 퍼즐을 하나씩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당장 지금의 상대와 지금의 내가 만나서 부대끼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의 상대와 앞으로 예상 가능한 상대의 전체 평균과 나의 전체 평균을 서로 합쳐서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하되 미운, 밉지만 사랑하는 관계는 그래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상대를 조금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순간 내뱉어버린 바늘이나 상황에 짓눌려 튀어나온 칼날에 덜 상처 받을 수 있고, 지금껏 지속적으로 보였던 애정과 꾸준했던 의지에 더 고마워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이라면 나와 너무 다른 그들을 지금보다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가족이라 함은 마치 나처럼, 내가 아닌 타인을 마치 나인 것처럼 대하는 과정이자 그런 관계. 명사이자 동사고, 속성이자 방향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사랑도 미움도 모두 평균을 내서 뒤섞는 것. 신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고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처럼 용서하는 사이. 그렇다면 지금 나는 상대를 가족으로 대하는 있는지. 나는 상대의 가족이려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가족인지. 상대에게 바라는 만큼 나는 하고 있나.

나는 좋은 가족이 아니었다. 부족하고 모자란 일원이었고,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으나 뚜렷하게 잘한 일도 없는 구성원이었다. 가슴에 못을 박는 말도, 지금까지 후회 중인 행동도 있었다. 가족 간 속죄는 용서를 비는 행위만이 아니니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잘못을 뉘우치고 잊지 않으며 다시 하지 않는 일로 용서를 구하는 중이다. 상대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직 용서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새삼 용서할 게 뭐 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잊어서도 안 되고. 나도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용서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수련이 얕아 아직 애를 먹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어느 한쪽이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나간 일은 결국 이해와 용서로 귀결된다는 것을. 지금은 아니라도 내게 상처 줬던 당시의 상대가 나보다 어려지면, 그때의 상대보다 내가 더 나이가 들면 분명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해체된 우리들이 각자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과 가족이 다시 예전 우리라는 가족으로 재결합되기를. 그 역시도 새로운 가족의 탄생일 테니.


해체되고 탄생하고 다시 해체된다. 그러며 완성된다. 우리는 모두 그 굴레의 어디쯤.




- 한국문인 2021년 9~10월 통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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