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매]
한인민박 현관에서 그는 스스로를 스물넷의 이한얼이라고 소개했다. 서글서글한 말투로 숨기고 있지만 언제든 발을 뺄 수 있게 무게중심을 뒤로 두고 있는 표정,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어휘,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눈빛까지, 한 마디로 아직 치기와 허세로 미숙한 청년이었다. 마치 알프스에 오르고 싶어 스위스까지 갔는데 모든 사람이 융프라우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가기 싫어졌다며 일행들이 정상에서 컵라면을 먹고 내려올 동안 인터라켄의 옥빛 호숫가만 하염없이 돌았을 법한 청년이었다.
그는 민박에서 만난 동갑의 청년과 친해져서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니 임시로 민준이라 하겠다. 둘은 만석이 되기 전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이쯤에서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 옆 자리에서 식사 중인 노인인데, 이름을 모르니 임시로 알프레도라고 하겠다.
여기서 시점을 알프레도로 바꿔보자. 피렌체에 살고 있는 알프레도는 가족들과 식사 중이었다. 사실 알프레도는 둘을 처음부터 주시했다. 허름한 티에 면바지, 그리고 때가 탄 운동화를 보아 하니 배낭여행 중인가 보다. 어느 쪽도 이태리 말은커녕 영어조차 유창하지 않아 메뉴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둘은 각자 티본스테이크와 레드 와인 한 잔씩을 시켰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 집은 스테이크도 잘하니까. 다만 그것만으로 양이 찰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은 파스타가, 특히 하얀 크림소스를 끼얹은 라비올리가 진짜배기인데. 그러고 보니 예전 나도 풍족하지 않게 여행하던 때가 있었고 객지에서는 현지인의 태도 하나가 나라의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누군가 무례하게 굴면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나라가 그렇게 보였고, 작은 친절을 얻으면 그 도시는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았다. 여행객들은 주로 북부에서 내려오니까 보통 베네치아와 밀라노, 그리고 이 피렌체가 그들이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의 도시일 것이다. 좋다, 오지랖이겠지만 기분 좀 내자.
알프레도는 웨이터를 불러 라비올리를 시켰다. 웨이터는 이미 식사가 끝난 식탁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알프레도의 빈 접시 옆에 따끈따끈한 김을 피우는 하얀 접시를 놓았다. 그럼 이걸 어떻게 전해줄까. 잠시 고민하던 알프레도는 아까부터 종종 눈이 마주치던 청년을 불렀다.
-이보게, 내가 그만 양 조절을 잘못해서 너무 많이 시켰어. 결국 모두 식사를 마쳤는데 이 파스타는 이제야 나오게 됐네. 포크조차 대지 않았으니 괜찮다면 가져가서 들지 않겠나.
당연하게도 여기까지의 속마음은 모두 추측이다. 노인이 무슨 생각으로 파스타를 권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노인의 가족이 이미 식사를 마쳤다는 것, 그리고 뒤늦게 메뉴를 시켰다는 것, 메뉴가 나오자마자 이들을 불러 저렇게 말했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다시 시점을 바꿔보자. 사실 한얼은 일찍부터 노인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었다. 앉은 순간부터 식사를 하는 내내 노인은 자신의 식탁을 종종 주시했다. 왜 우리를 쳐다볼까. 작은 불편함을 느끼던 중에 노인이 웨이터를 불렀다. 식사를 마쳤으니 계산을 하고 가려나 보다. 잘됐다는 생각에 그는 식사에 집중했다. 잠시 후 노인이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방금 나왔음이 분명한 파스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린 식사가 끝났다. 너무 많이 주문했다. 포크도 대지 않았으니 괜찮으면 가져가라.
영어가 유창하고 무엇보다 느렸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얼과 민준의 성격이 드러났다. 민준은 어른스럽고 솔직한 성격이라 누군가 건넨 호의를 말끔하게 받을 줄 아는 청년이었다. 반면 한얼은 그러지 않았다. 치기와 허세로 가득한, 뜻밖의 호의에 어색해하는 청년이었다. 민준이 받으려는데 한얼이 그를 말렸다. 그리고 노인에게 말했다.
-괜찮다. 우리는 배가 부르다. 권해줘서 고맙다.
여기서 다시 시점을 바꿔보자. 알프레도는 청년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알프레도가 지금껏 살았던 사회에서는 충분히 용인될 만한 일이었으니까. 알프레도는 웃으며 받지 않으면 이 음식은 버려지게 된다, 괜찮다면 받으라고 재차 제안했지만 청년은 여전히 거절했다. 그것도 딱 잘라서. 표정은 정중한 미소였지만 눈빛에서 왠지 모를 거부감이 보였다. 다른 청년은 받고 싶은 눈치였다. 두어 차례 제안과 거절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물며 제안이 반복될수록 애써 감싸놓은 정중함이 벗겨지며 거부감이 삐죽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쯤에서야 알프레도는 포기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저 청년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 그래, 서로 악의가 없어도 일이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알프레도는 웨이터를 불러 자신의 식탁을 계산했다. 빈 접시들 곁에서 덩그러니 김을 내는 라비올리도 포함해서. 그때 알프레도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동양 어느 나라에서 온 이름 모를 청년이여, 나는 자네를 탓하지 않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악의는 없었어. 훗날 자네가 이 일을 떠올리며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누구의 잘못은 아니니 자책은 하지 말게. 다만 혹시 나중에라도 피렌체 어느 식당에서 자네에게 라비올리를 권하던 이 노인이 떠올라 아쉬운 마음이 든다면 그때라도 자네가 만난 다른 이에게 그렇게 해주게. 꼭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어도 좋고, 라비올리가 아니어도 좋네. 언젠가 자네가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약간의 쓴웃음과 함께 단골 음식점에서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권할 수 있게 된다면 오늘 우리의 짧은 만남도 결국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누구도 먹지 않은 저 라비올리도, 오늘 나의 오지랖으로 지불한 10유로쯤도 결코 아깝지 않을 테지.
이탈리아까지 온 먼 나라의 여행자여, 만나서 반가웠네. 부디 자네의 남은 여행에 안전과 행운이 깃들길.
- 계간수필 202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