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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의 위로

[15매]

by 이한얼






잠결에 스산하지만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방충망으로 된 천장 너머에서 솔잎이 스치는 소리였다. 소나무 가지들이 낮은 바람에 물결치듯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풍경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목 뒤에서 엉성하게 무너지는 베개 비슷한 느낌. 넓적다리 부근에 촘촘하게 박힌 새벽이슬. 저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파도 비슷한 소리. 그쯤에서야 지금 어딘지 떠올랐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졸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일어나보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간밤은 8월로 넘어가는 길목이라기에는 꽤 쌀쌀했다. 베개로 삼은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연청색 카펫 아래로 붉은 기운이 물감처럼 번지는 중이었다. 날이 흐린지 해는 보이지 않았다. 손목을 내려다보니 일곱 시 하고 절반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일단 커피와 재떨이를 든 채 텐트촌 뒤쪽으로 가보았다. 나를 위해 피해준 건지 갓길과 소나무 숲 사이에 주차해놓은 차 운전석에 네가 누워있었다. 창 너머로 드리우는 그림자에도 미동 없는 폼이 아직 자는 건지 아니면 눈만 감고 있는 건지. 혹시 모르니 조용히 트렁크를 열어 접이식 의자를 꺼낸 나는 잔뜩 꼬인 이어폰을 풀며 바닷가로 향했다.

어젯밤 후끈한 열기가 식어버린 바닷가는 사람 하나 없이 그림처럼 놓여있었다. 모래알을 한 줌씩 밟아나가다 이내 파도가 들썩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리에서 의자를 펼쳤다. 바다를 바라보게 내려놓고, 흔들리지 않도록 꾹꾹 눌러 수평을 맞췄다. 신고 온 슬리퍼도 떠내려가지 않게 의자 틈새에 잘 고정시켰다. 앉아 보니 들이치는 파도가 발등을 쓸고 지나갔다가 뒤꿈치에 모래를 쌓아두고 빠져 나갔다. 딱 좋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뱉은 날숨이 기지개를 필 새 없이 볼을 타고 뒤로 달려갔다. 강한 해풍이 숨에 섞인 커피 달달한 내까지 모조리 품고 사라졌다.


문득 작년 이맘쯤이 떠올랐다. 누군가 자꾸 부르는 것 같아 그 이명을 정처 없이 따라가다 도착한 곳이 여기 동해였다. 서울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던 내가 저녁은 왜 3시간이 떨어진 이곳에서 먹고 있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인적 드문 해수욕장에 하릴 없이 앉아 있는 사이 무심히 해가 졌다. 놔두고 간 우산처럼 방치된 사람이 차곡차곡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달이 해처럼 수평선 위로 한 뼘쯤 올랐을 때였다. 저 별은 나의 별로 시작해 물아일체로 끝난 낙산의 밤바다. 검은 바다에 가슴 묵직한 고백을 토해놓고 지레 무서워진 나는 모래밭에 드러누워 울었다. 쏟아지는 별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엉망진창인 채로 두어 시간 해변을 뒹굴었던 그 시간들. 불쑥 찾아와 내 멋대로 굴었지만 바다도 하늘도 모두 받아주었다. 그렇게 서늘하지만 다정하게 위로 받으며 그날 나는 전생의 내게 사과하고 과거의 나를 용서했었다. 그리고 오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1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나는 울진 바닷가에 와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살았고 얼마나 갈렸을까. 무엇이 변하고 어떤 것이 그대로일까. 잔잔한 파도 위로 하얀 포말 같은 상념이 휘몰다 사라졌다. 작년과 함께 있는 사람은 다르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다. 썩 훌륭해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 못나지지도 않았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는 전진하기도 후퇴하기도 했고, 변하기도 변하지 않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아직 살아있고, 여기서 숨 쉬고 있다. 뒹굴던 개똥밭에 불이 붙었어도, 그래서 그 물로 뜨끈한 세수를 했어도 나는 여전히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잤다. 쏟아지는 화살과 낙석은 좌우로 피했고, 걸어온 뒷길이 무너지며 나를 쫓아오기에 달렸다. 미친 사람처럼 싸우지 않으면 가진 것을 뺏겨야 하는 투쟁 속에서도 어쨌든 살아남았다. 지금도 살고 있고,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커다란 변수가 없는 이상 내일도 내년에도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상관없이 내 삶의 대전제는 여전하다. 나는 살아간다. 이것만 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그 과정일 뿐이다.


겹겹이 쌓인 구름 사이로 어느덧 해가 드러났다. 잠시지만 잘 쉬었다. 그럼 다시 가야지. 파도가 잠시 빠졌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워놓은 슬리퍼를 꺼내 신고 의자도 다시 접었다. 한 시간 동안 비어버린 커피 캔과 바닷물에 불어 주름진 발바닥. 이 정도면 훌륭한 휴식이다.

의자를 접고 돌아서니, 너는 모래언덕 위에서 이쪽을 향해 있었다. 표정을 꼼꼼히 살피기엔 거리가 멀었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네가 어떤 마음일지. 공기 속에서 익사하는 듯한 나를 보며 그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돈이 없다며 여행을 고사하는 소인배에게 칫솔만 챙겨오라고 말한 너는, 차를 빌리고 직접 운전해서 여기에 왔다. 마음 바닥이 길게 찢어져서 내용물을 줄줄 쏟는 중에 애먼 길바닥에서 그러지 말라는 듯 여기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바다로 들어가는 중인지 거기에서 나오는 중인지는 알 수 없는 석상을 너는 모래 언덕 위에서 말없이 기다려줬다. 살면서 한 시간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이를 나는 앞으로 몇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10년이 지나면 우리가 이번 여행 중에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어딜 가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전부 갈색 가루가 되어 사라질 테지. 하지만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서 발바닥이 불었던 이 감각과 돌아봤을 때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너의 모습까지, 이 한 시간만은 평생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소나무에 기대어 모래를 털고 있는 내게 다른 질문 없이 아침으로 순댓국 어떠냐고 묻는 네가 고맙다. 살아갈수록 너 같은 사람을 만나기 점점 어려워졌고 앞으로 더 어려워질 터인데, 열셋의 이른 나이에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계간 현대수필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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