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한얼 Aug 29. 2022

티와이에프와이에스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저희 사립외래어진흥원을 물심양면 지원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해방 직후 여러 언어학자들이 시작한 ‘우리말 바로 세우기’ 운동에 맞서 ‘일상 속 외래어 지키기’를 위해 노력해온 저희 사립외래어진흥원은 한때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상 외래어가 근절될 위기도 맞았으나 다행히 현재 전무후무한 성취를 내며 창립 77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희 사립외래어진흥원은 언제나 대중의 언어생활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주체는 정부, 기업, 방송언론인, 그리고 문화예술인이라 여겨 왔으며 그분들께 일상 속 외래어가 더욱 견고해질 수 있도록 꾸준한 지원을 요청해왔습니다.

  그중 먼저 일상 외래어를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있는 지자체에 감사드립니다. 흡연구역을 스모킹 에어리어로, 멈춤과 출발을 스톱과 고로, 재활용 구역을 리사이클 하우스로, 노점을 로드 샵으로, 당기시오와 미시오를 풀과 푸시로, 환승정차구역을 키스 앤드 라이드(케이 앤드 알) 등등 이 짧은 지면에 다 담지 못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통해 한글 병기 없는 외래어 파종을 적극 힘써주고 계십니다.

  기업은 수많은 업체에서 선전해주고 계시나 그중 특히 백화점과 건설 업체, 그리고 화장품과 패션 업계의 약진이 눈이 부십니다. 화장실을 토일렛으로, 잔디밭을 그래스 필드로, 공원을 패밀리 포레스트로, 광장을 그린 아고라로, 이렇듯 익숙하고 평범한 풍경부터 조금씩 외래어로 바꿔나가는 아이디어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한국어는 아무래도 촌스럽고 값싸 보이니까요. 같은 제품과 공간이어도 외래어는 고급스럽고 한국어는 없어 보인다는 의식을 꾸준해 전파해주시길 바랍니다.

  백화점만큼 건설 업체에도 감사드립니다. 아이를 기다리는 정류장을 맘스 스테이션으로, 방문객 내방소를 헬로 라운지로, 경로당을 시니어 클럽이나 실버 클럽으로, 관리소를 매니지먼트 오피스로, 휴게실을 티 하우스로, 경비실을 인포메이션으로, 알림판을 노티스 보드로, 입구와 출구를 인과 아웃으로, 농장을 가든 팜으로, 놀이터를 키즈 스페이스로, 대체할 수 있는 모든 한국어를 외래어로 바꿔주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외래어가 더 고급스러워 보이니까요. 그만큼 비싸도 저항감이 덜하겠지요. 그런 고급화 전략이 입주인과 비입주인의 급 나누기에도, 그리고 입주민끼리의 선 긋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글 병기 없이 외래어를 곳곳에 심어두면 익숙한 사람은 익숙한 그대로, 아직 덜 익숙한 사람은 더 익숙하게, 외래어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별말 없으니 반발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이 특히 훌륭합니다.

  그리고 화장품과 패션 업계의 선전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요. 양쪽 모두 있는 단어라면 외래어로, 새로 만들어야 하는 단어라면 역시 외래어로, 앞서 말했다시피 한국어는 촉촉하지도 분위기 있지도 않으니까요. 앞으로도 더욱 더 다양한 외래어 창작과 전파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대기업뿐 아니라 소상공인 분들도 사업등록을 영어로 하거나 3층 이하의 5제곱미터보다 작은 간판은 한글 병기 없이 외래어로만 가게 이름으로 쓸 수 있으니 적극 권장합니다.

  그리고 2022년 상반기에 유난히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패브릭 랩과 엠에스쥐알, 그리고 스시부리또와 네이처스 시리얼이었습니다. 보자기와 미숫가루, 그리고 연어김밥과 화채를 이렇게 고급스럽고 있어 보이게 표현할 수 있을 줄 저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진흥원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군요.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되는 훌륭한 발상이라 따로 언급합니다. 같은 제품이어도 외래어 이름이면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전략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다만 너무 노골적이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부 완급 조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이 만들고 퍼트린 외래어를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게 해준 방송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많이, 널리 자리 잡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힙하고 영하고 프레시한 외래어 활동을 응원합니다. 한국어와 외래어 모두 있는 단어라면 응당 에이지나 보이스라고 말해야지, 요즘 누가 나이나 목소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음악인을 포함한 여러 문화예술인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같은 말이라도 한국어 대신 외래어로 여러 창작을 해주신 덕분에 외래어의 고급화 전략이 보다 쉽게 스며들 수 있었습니다. 덕수보다 디유케이에스오오로, 달보단 문으로 이름을 짓는 게 훨씬 힙하고 쿨하니까요. 앨범을 한국어로만 만들고자 하는, 혹은 되도록 외래어를 쓰지 않으려는 특이한 음악인과 방송인도 있는 듯싶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는 작가 및 다른 창작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일례로 저희가 아는 어떤 30대 수필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 글을 쓰는 한국인임에도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외래어를 말하고 다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제를 리포트라고, 일기를 다이어리라고 태연하게 혼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그런 분들이 저희의 가장 큰 아군이십니다.

  저희 사립외래어진흥원은 앞으로 일상 속 외래어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언젠가 유치원생이 한글은 촌스러워서 배우기 싫다고 하는 그날까지, 조사와 서술어를 빼고 대부분의 단어가 외래어로 대체가 되는 그날까지, 외래어를 모르면 목적지조차 못 찾는 그날까지, 같은 말이라도 외래어 대신 한국어를 쓰면 촌스럽고 유치하고 낡아 보이고 멋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될 때까지 저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2022년 한국수필 7월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