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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수들의 삶

[15매]

by 이한얼






10년 전.

20대 어느 날 광주 터미널에서 내 또래쯤의 한 남자를 봤다. 보통이라면 스쳐 지나갈 행인이었지만 작은 물건 덕분에 나는 그를 무례할 정도로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손바닥 반 만한 작은 통에 집어넣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살면서 재떨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내 기분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멋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의아했다. 왜 나는 지금껏 바닥에 꽁초 버리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을까. 어떤 근거로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까. 반쯤 남아있던 담배가 모조리 타들어갈 때까지도 행동의 근거를 ‘남들도 다 그러니까’ 밖에 찾지 못했다. 문득 손에 든 꽁초를 어찌 해야 할지 허둥거리던 나는 엉겁결에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쓰레기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며 생각했다. 저 행동은 멋지다. 그럼 따라하자.

그날 이후 내 뒷주머니에는 늘 조그만 비닐 지퍼 팩이 들어있었다. 서른쯤 찍은 사진부터는 지퍼 팩 대신 작은 스테인리스 통이 담뱃갑 옆에 함께 찍혔다. 하지만 아쉽게도 재떨이를 들고 다니는 다른 사람을 더는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5년 전.

당시 내가 쓰던 <삼발 육각 탁자>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집단을 크기에 따라 네 개로 나눴다. 첫째로 숫자가 너무 적어 영향력이 없는 ‘작은 소수’, 둘째로 아직 다수보다 적지만 다수 못지않은 덩치인 ‘큰 소수’, 셋째로 다수지만 언제고 다시 소수가 될 수 있을 만큼 불안한 크기의 ‘작은 다수’, 마지막으로 숫자가 많아 이미 상식과 기준이 되어 버린 ‘큰 다수’까지.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정의를 바꿀 수 없는 이유는 수가 적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전 정의와 상식을 뒤집으려는 자들의 시작은 언제나 ‘작은 소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다른 이를 흡수해 ‘큰 소수’가 되는 일이고, 그렇게 수를 불리다 결국 ‘작은 다수’까지 되어야만 이전 정의가 뒤집힌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작은 소수’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설득뿐이라고 여겼다. 흑인의 권리는 흑인만으로 찾을 수 없고, 여성의 권리는 여성만으로 이룩할 수 없고 장애인의 권리는 장애인만으로 쟁취할 수 없듯 ‘무엇인가를 바꾸려는 사람’은 반드시 ‘아직 그걸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의 생각을 바꿔야 함에 그 방법이 폭력은 아니라고 말했다. 신체적이든 언어적이든 폭력은 아주 한정적인 상황에서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만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작은 소수’의 우리 좀 살려달라는 외침이거나 ‘큰 다수’의 이전 기준을 말소한다는 강압이면 잠시 공감하거나 납득될 수도 있지만, 그런 폭력조차 단지 어떤 기점일 뿐 어느 순간에도 정당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으로는 소수 안에서 덩치를 조금 불릴 수는 있어도 절대 다수로 넘어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제.

집 근처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밤섬에 있는 카페로 차를 마시러 갔다. 주차장과 부지가 넓고 야외 테이블이 많은 커다란 카페였다. 곳곳에 금연구역이라는 팻말이 있기에 주문하면서 흡연구역이 따로 있는지 물었다. 기대 없이 물었고 역시 없다고 했다. 100미터쯤 떨어진 주차장 입구, 즉 카페 부지를 완전히 벗어나야 가능하다고 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주차장 입구로 걸어갔다. 예상했지만 입구 앞 자갈밭에는 마치 지들이 들국화인 양 하얀 꽁초들이 삼삼오오 박혀있었다. 이 넓은 부지에 작은 흡연구역조차 없는 것보다 그 모습이 더 아쉬웠다. 점점 금연구역이 늘어나는 것도, 그에 비해 흡연구역은 늘지 않는 것도, 한 달 만에 담뱃값이 두 배쯤으로 훌쩍 뛰는 것도, 다중이용업소 금연법이 일방적으로 바뀐 것도 입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법은 만들면 만들어지니까. 이건 그 후의 체감과 반발로 이어지는, 명분과 설득의 문제였다. 흡연자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법도 흡연자이기에 항변할 수 없었다. 그동안 꾸준히 스스로의 명분을 줄여왔으니까. 여기서 내가 주차장 바닥에 꽁초와 침을 뱉으며 ‘이건 흡연구역도 재떨이도 없는 상황에 대한 나의 반항 행위’라고 선언해도, 출퇴근 시간에 입구를 막아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게 한 채로 ‘흡연 구역을 만들어 달라’고 어린애처럼 소리쳐도 소용없다. 이용자의 다수가 흡연자라면 애초에 흡연구역이 있을 것이다. 없다는 것은 흡연자는 흡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실제 숫자가 가진 권리보다 더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흡연구역이 없기 때문에 걸으며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꽁초를 버리는 건지, 그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굳이 흡연 구역이 필요 없는 건지, 굴레의 원인은 이제와 찾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은 한쪽 방향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닥에 꽁초를 버리면서 흡연구역을 만들어달라고 아무리 외친들 상대는 절대 공감해주지 않고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그에 ‘큰 소수’인 흡연자 중에서도 ‘작은 소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어느 정의를 걸친들 ‘작은 소수’의 삶은 대게 이렇다.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맞은편에 선 ‘작은 다수’만이 아니라 나란히 선 ‘큰 소수’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훗날.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우리가 원래 가져야 할 권리를 주장해야 정의에 명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명분으로 설득해야만 상대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생긴다.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위 군중 속에 백인도 있는 것처럼, 무지개 깃발 사진을 테그 하는 사람 중에 이성애자도 있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넓은 부지 어느 구석에라도 ‘큰 소수’를 위한 원두 찌꺼기 그릇이 놓이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작은 소수’의 스테인리스 통은 단지 그들의 가방에만 있을 뿐 굳이 꺼낼 필요도 없어질 테고. 그렇게 언젠가는 우리 ‘큰 다수’는 배수구 근처에서 흉물스럽게 피어난 하얀 꽃 뭉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뭉게뭉게 꼬리를 뿜어내는 누군가와 기차놀이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




- 좋은 수필 2022년 7월호

- 2023 제5회 좋은 수필 베스트 에세이 10











<원고량을 맞추기 위해 덜어낸 여분>


지금까지 그걸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만으로는 바꿀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에 바꾸고 싶은 사람이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폭력으로 되레 자극한다면 그걸 무슨 수로 바꿀 셈인지.

우리 작은 소수가 설득해야 하는 것은 흡연을 하지 않는 작은 다수뿐이 아니다. 흡연을 하고 있는 큰 소수도 설득해야 한다. 흡연을 할 공간이 없어서 길바닥에 꽁초를 버린다. 길바닥에 꽁초를 버리는데 흡연구역이 왜 필요하냐. 이제 굴레가 되어버린 순환 속에서 무엇이 먼저인지, 무엇이 원인인지는 찾을 수 없다. 찾는다 해도 그것이 상대를 설득할 근거가 되지 않고. 이미 우리는 모두 피해를 본 사람들이니까. 설령 만약, 만에 하나 흡연 구역이 없어서 길바닥에 꽁초를 버린다 해도 그 이유로는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린 비흡연자를 절대 설득할 수 없다. 애당초 금연구역이 없던 시절부터 흡연자는 바닥에 꽁초를 버렸기에 주장에 근거 또한 없다. 그리고 이미 오랫동안 길거리 간접흡연과 꽁초와 침으로 악감정이 생긴 사람은 저 주장이 사실인들 흡연자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결법은 하나, 한쪽 방향뿐이다.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길바닥에 꽁초를 버리지 않으면서, 우리는 달라지고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100% 전부 달라진 건 아니지만 우리는 이제 달라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계속 우리 같은 사람이 많아질 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흡연자에게 말해야 한다. 근데 우리도 흡연 구역이 필요하다고. 남에게 피해를 덜 주기 위해 흡연 구역을 찾아봐도 반경 몇 백 미터 안에 없다고. 기껏 드물게 있는 흡연구역도 너무 갑갑하다고. 구역을 나눠 놓았는데 왜 지붕까지 필요하냐고. 그래야 비흡연자들도 우리에게 공감한다.

‘그래 좀 너무 없긴 해. 우리가 원하는 건 살면서 아주 약간의 담배 연기조차 안 맡겠다는 게 아니야.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팔고 있다면 자동차 매연처럼 살다 보면 어쩔 수 없게 맡게 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그 어쩔 수 없음이 자동차를 내 집 정원 안까지 몰고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 아니듯이 원하지 않는 상황과 순간에 맡고 싶지 않은 거야. 길을 걷다 흡연 구역 옆을 지나가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맡게 되겠지. 그 정도는, 그 잠깐쯤은 괜찮아. 거기 흡연구역이 있음을 인지하고 지나가는 거니까. 거기 근처 말고는 다른 곳은 안 나니까. 내가 비흡연자로서 금연 구역에서 담배 연기 없이 쾌적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듯, 흡연자는 흡연 구역에서 편하게 담배 펴. 천장 같은 거 막아두지 말고. 그러니 연기가 안에 고여서 흡연자들이 구역 안으로 안 들어가잖아.’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비흡연자들이 협조적이지는 않겠지. 이렇게 말해주지도 않겠지. 하지만 우리가, 이쪽이 먼저 설득하지 않으면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국 저쪽으로 갈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역시 그러지 않나. 다른 것에 대해 아직 바꿀 생각이 없는 우리가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하고 있듯이.

어떤 정의를 걸고 있든 작은 소수의 삶은 대게 이렇다. 우리는 하나의 파이를 억울함 없이 나눠먹기 위해 끊임없이 자르고 붙여야 한다. 다행히 머리 좋은 어느 문제처럼 세 번의 칼질로 5등분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굳이 바꿀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과, 나아가 바꾸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계속 설득하며 파이를 자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 넓은 부지 안 어느 구석에라도 원두 찌꺼기를 담은 작은 뚝배기가 놓여 있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 스테인리스 통은 단지 가방에만 있을 뿐 굳이 꺼낼 필요가 없어지겠지. 우리 모두는 길거리와 배수구 근처에 흉물스럽게 피어난 하얀 담배 꽃을 더 이상 안 봐도 될 테고.

어떤 일을 오래, 또 많은 이들과 함께 하다 보면 그것이 괴상함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다른 일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간단해진다. 내가 아무리 매운 짬뽕을 좋아한다고 해도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간 동료의 코에 짬뽕 국물을 들이붓지는 않는다. 가게를 나서면서 기다리던 다른 손님 얼굴에 대고 트름을 하지 않는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내 이의 고춧가루를 빼던 이쑤시개를 옆 사람 키보드 사이에 꽂아두지 않는다. 이것이 대단히 이상한 일이듯이,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침을 뱉고 꽁초를 틈새에 끼워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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