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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Aug 30. 2022

순환 앞에 산다






  삼일 전, 문 앞에 모르는 택배가 있다. 택배 시킨 적 없는데. 주소를 확인해 보니 우리 집이 맞다. 이름이 다를 뿐.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근처 사는 사람이 주문할 때 동호수를 잘못 적었거나, 전에 살던 사람이 주문할 때 주소를 깜박하고 바꾸지 않았거나. 왠지 후자인 듯했다. 경험 상 그랬으니까. 그럼 놔두면 되겠다. 요즘은 택배 문자가 가니까 배송 완료가 됐다는데 집 앞에 택배가 없으면 확인해보겠지. 그렇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택배는 여전히 우리 집 문 옆을 지키고 있다. 왜 안 가져갈까. 바쁘게 사느라 배송 완료 문자를 봤지만 깜빡해서? 혹은 배송을 확인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아직 찾으러 오지 못해서? 이 둘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바빠도 오배송된 택배를 깜빡할 리가.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 오후니 올 만한 거리였다면 어제오늘 찾으러 왔겠지. 아니면 택배사와 연락을 했지만 마침 주말이라 월요일에 수거할 예정이라서? 혹은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택배 문자 시스템에 익숙지 않아 계속 기다리는 중이라서? 이쪽이 유력하다. 전자면 놔두면 되겠지만 왠지 후자 같았다. 여기 이사 왔을 때 텅 빈 집 안에서 연세가 있는 생활감을 느꼈으니까. 현관문에 왠지 자녀가 붙여준 듯한 ‘가스 확인!’ 이라는 종이라든지. 그래서 나가는 길에 결국, 또 오지랖을 참지 못하고 택배 상자에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신호 대기음을 들으면서도 지난 경험들 탓인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주소의 현재 입주민이에요. 집 앞에 모르는 택배가 있어요. 아무래도 전에 사시던 분께서 주소 변경을 깜빡하신 것 같은데, 김 아무개님 맞으세요?”

  여기까지 말하며 나는 지난 경험을 되짚어봤다. 모르는 사람에게 택배 오배송에 대해 전했을 때 받은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고맙습니다! 확인해볼게요! 둘째, 놔두면 수거해갈 거예요. 셋째, 제가 주소 드릴 테니 좀 보내주시면 안 돼요? 넷째, 확인했습니다. 1번은 말 그대로 고맙다는 투. 2번은 굳이 뭘 전화까지 했냐는 투. 3번은 맡겨 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투. 4번은 부하 직원에게 보고받은 투. 그럴 때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일임에도 대가를 받지 못한 것처럼 마음이 상했다. 나는 좋지 않은 꼴을 더 많이 봤음에도 왜 아직 이 짓을 하고 있을까. 지난번에 분명, 꽁한 마음으로 ‘다음부터는 그냥 놔둬야지’라고 다짐했으면서.

  “내가 김 아무개 맞아요. 전에 거기 살았던 사람도 맞아요. 아무래도 주소 변경을 깜빡했나 봐요.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 20분이면 찾으러 갈 수 있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예상보다 젊은, 사오십 대쯤의 여성이었다. 놀란 듯했지만 말투는 부드러웠고, 동시에 조금 호들갑스러웠으며, 그리고 왠지 웃음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짧은 대꾸만으로 전화 너머 일면식 없는 상대의 모습이 쉬이 그려졌다. 밝은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실수를 과하게 자책하지 않는 사람이고, 이 정도의 일은 긍정적인 자소와 함께 넘길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다. 말투는 일종의 인성 지문이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에 어떻게 대하는지, 상대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있는지, 예상 못한 일에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의 실수는 어떻게 취급하는지, 이 뜻밖의 상대에게 어떤 어조로 대꾸하는지, 그 강제성 없는 선의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표현할 건지, 상대의 호의에 기대어 부탁을 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10초의 짧은 문장 안에 그 모든 것이 꾹꾹 담겨 있었다.

  내 기준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타인을 최소한 무례하지 않게 대하는 것. 상대가 호의를 내밀었을 때는 호의로 대꾸하는 것. 선의를 바랄 때는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 우리 모두 그렇게 하기로 정한 기본적인 반응이다. 대단한 것도, 뛰어난 것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의 반응.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이 이렇게까지 오락가락하는 까닭은 요즘은 이런 정상적인 반응조차 쉽게 볼 수 없어서겠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문 앞에 택배를 뒀으니 편할 때 찾아가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조금 씁쓸한 여운으로 카페까지 걸어와서, 다시 좋아진 기분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씁쓸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문득, 문자 하나를 받았다.

  ‘연락 주신 덕분에 물건 잘 찾아갑니다. 빵 작은 것 두고 왔으니 작은 것이나마 맛나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좋은 추억과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예상치 못할 때 사람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감동은 언제나 이런 찌르르하고 새콤달콤한 맛이다. 나는 한동안 문자를 들여다 봤다. 담배 반절을 마저 피우고, 새로 하나를 다 피울 때까지 계속 들여다 봤다. 맞다. 내가 또 깜빡했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완전무결하지도 않고 문제도 많고 삐걱거리는 곳도 많지만, 인터넷이고 주변이고 뉴스고 온통 이상한 사람들과 나쁜 인간들 천지 같지만, 세상이 점점 망가지는 것 같고 세대에 망조가 드는 것 같고 모든 게 엉망으로 달려가는 것 같지만, 하지만 언제나 그랬다. 이 세계에는 악인보다 선인이 많고, 이상한 사람보다 보통 사람이 더 많다. 그들이, 저쪽이 유난히 눈에 띄고 오래 기억에 남을 뿐, 여기 우리가 사는 이곳은 무엇인가를 망치려는 사람보다 망가진 것을 고치고 새로 만드는 사람이 월등히 많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고, 끝까지 증오하는 사람보다 끝내 용서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네 일상이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렇듯 저렇듯 데굴데굴 굴러갈 수 있는 것이 비정상보다 정상이 훨씬 더 많다는 반증임에도, 나는 그 사실은 자주 까먹는다. 그것에 구원을 얻고 거기서 혜택도 받고 그 덕분에 지금 이만큼 숨 쉬며 살고 있음에도, 쉬이 눈에 띄고 냄새나는 쪽에 정신이 팔려 나는 자꾸 그 섭리를 잊고 산다.

  악인이 선인보다 조금이라도 많다면 우리가 사는 여기는 이런 모습일 수가 없다. 선인이 악인보다 월등히 많지 않다면,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건너편이 모르게 옆을 돕고 있지 않는다면, 미워하고 증오하는 삶보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이 많지 않다면, 우리는 이 정도 사회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우리는 훨씬 괴롭고 월등히 천박한 세상에서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조차 누리지 못한 상태로 하루를 마쳐야 하고, 언제 내 가족이 칼을 맞거나 납치될 지 두려워하며 아침을 시작해야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 옆 자리에 앉은 이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지 않을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이 카페 테이블에 휴대전화를 놔두지 못하고, 공항 정류장에 캐리어로 줄 세우지 못하고, 문 앞에 택배를 방치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오지랖을 떨고 있는가. 그건 무의식으로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나는 지난 몇 번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며, 그리고 나 역시 수많은 이의 오지랖 같은 선의와 대가 없는 호의에 둘러싸여 그들에게 감사하고 살았음을. 악순환의 시작은 처음 악을 만든 사람이 아닌 선순환을 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선순환의 시작은 악순환을 끊는 그 순간부터겠지.

  그래서 오늘 문자를 보내준 상대가 고맙다. 정상적인 대처와 멋진 보답을 보여줘서가 아니라, 잊지 말고자 하면서도 자주 잊고야 마는 점을 다시 한 번 내게 상기시켜줘서.

  좀 이따 집에 가서 먹을 빵이 얼마나 달콤할지, 벌써 기대가 된다.




 - 문학 수 2022년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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