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열 시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칸트와 소크라테스가 서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서른 즈음의 모든 아이에게 한 번은 찾아온다고 한다. 하필 왜 그때냐니까 너무 이르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이 시기가 지나면 문을 잘 안 열어준다고, 결혼까지 했으면 초인종을 누른 순간 문 밖까지 들리던 TV소리가 갑자기 사라진다면서 허허 웃는다.
허리가 아파 오래 앉아있을 수 없어 안타깝다. 앉은 자리에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자세를 잡아 봐도 통증은 여전하다. 그저 앓는 소리로 한 자 찍고, 기지개를 켜고 두 자 찍으며 머릿속 운동장을 돈다. 이러다 어느 세월에 속이 있는 것을 다 꺼내놓을까. 사람들은 가진 것 반의반도 내보이지 못한 채 묵히고 삭히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 중 절반은 이내 말하는 법도 잊어버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을 놓치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텐데. 나 역시 소실되고 갈변하는 시간에 파묻혀 놓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쭉정이뿐이다. 헛한 감촉에 매번 울 수 없어 결국 웃으니 이제는 허탈해서 웃는 건지 기뻐서 웃는 건지, 아니면 웃어서 기쁜 건지 그냥 웃어버리는 건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아침이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오만 생각과 함께 샤워를 하고, 더 무거운 걸음을 끌고 밖으로 나간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의미 없는 시간은 훌렁훌렁 잘도 흘러간다. 그러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퍼뜩 뒤돌아보지만 고작 서너 걸음 건너왔을 뿐인 나를 발견하면 양극적인 감정 속에 허우적거리다 익숙한 카페로 피신한다. 눈 시린 할로겐 조명 아래서 커피를 마시고 막다른 공간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에 절이다 보면 어느새 날짜가 바뀐다. 그러면 찬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 뒤에 다시 일으킬 몸을 눕힌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도 잃어버리고, 그러다 애당초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 홀로 가졌다는 착각임을 알게 되면 그제야 불 꺼진 방에서 운다. 하루 종일 약불에 졸여진 마음이 이윽고 터져 방에 탄내가 넘쳐흐른다. 나는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이유가 있을진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는 건지. 어딘가에 있을 텐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나는 왜 태어나야 했고, 왜 이 일상을 견뎌야 하고,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 지금 당장 사라질 수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데 왜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는 건지. 오만 상념들이 눅눅한 방 안을 휘돈다. 오늘 만나야 하는 사람을 만나는 동안 그들도 나와 같았을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날 수 없고 그들도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날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과 함께 했다면 우리의 만남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으니 삶이라지만 왜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을까.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만족해야 행복한 삶이고 세상에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며 살고 있을까. 혹시 행복한 이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가 더 많다면 세계는 무엇일까. 어떤 의도로 누가 유지하고 사람은 어느 용도로 사용되는 걸까. 하루 종일 고통을 참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을 것을 하고, 원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데 하루를 마무리하는 때마저 행복하다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왜 살고 있을까. 왜 내일도 모레도 견뎌야 할까. 언제의 무엇을 위해서? 올지 말지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의 행복 때문에? 왜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할까. 내 시간은 예전도 지금도 그때도 똑같이 소중한데 왜 참고 견뎌야 하나. 왜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나.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던 생각은 어느덧 없던 듯 사라진다. 언제나 답은 없고 수많은 질문과 그보다 무거운 뒷맛만 남긴다. 그래도 내일은 좀 더 괜찮을 거야. 덜 아프고 덜 슬프게 살 수 있을 거야.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조금 더 할 수 있을 거야. 오늘보다 내일 더 괜찮을 거야. 모레는 그보다 더 나아질 거야. 그렇게 매일 스스로를 위로한다. 속이고 달랜다. 나아질 거라고, 오늘 같지는 않을 거라고, 최소한 오늘보다 나빠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혀 나아지지 않은 마음을 확실하지 않은 기대로 보듬으며 울다 지쳐 잠이 든다. 눈가와 인중과 가슴과 손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오늘을 망각 너머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눈을 뜬 내일은 새로운 어제가 된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니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겠고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하는 꿈이 있지만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하니 직장을 다니고, 직장을 다녀야 하니 준비를 하는 동안 내 하루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그 준비와 직장과 먹고 사는 일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낮아지고 낮아지다, 결국 엎드린 채로 이쪽이 천장이라 스스로를 속이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 삶에 결국 무엇이 남나. 알 수 없는 행복과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꿈을 제쳐두고, 꿈을 위한 하위 계획과 먹고 살기 위한 돈과 돈을 위한 필요 준비마저 넘기고, 자기만족을 위한 허영도 꾸밈도 타인을 위한 육아도 뒷바라지도 외면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상도 성취감을 위한 노동도 본능을 충족하기 위한 마지막 욕구도 다 빼버린다면, 그럼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 거기까지 좌초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남을까. 끔찍하게도, 모든 실마리를 풀어갈 첫 질문은 아무것도 없는 저기에서부터 시작 되어야 하는 걸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대신 후회하지 말라는, 그 흔한 말.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그 무책임한 말. 이 말뿐이 출발의 반석일까.
오징어 없는 김치전을 내어주며 칸트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삶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내게 된 것이냐고. 달걀 고명이 빠진 잔치국수를 먹고 있는 소크라테스한테도 묻고 싶다. 마지막 독약을 마실 때 당신 삶의 목적은 결국 어디에 있었느냐고. 그럼 가진 것이라고는 꿈과 몸뚱이뿐인 나에게 그들은 어떤 웃음을 되돌려줄까. 이게 왜 고민거리인지 모르겠다며 의아한 얼굴을 한다면 나는 무슨 핑계를 주워 삼킬 수 있을까.
- 수필 오디세이 2024년 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