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P의 여행

[18매]

by 이한얼






2005년에 첫 MBTI 검사를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뻔히 예상은 간다. 당시 나는 ENFP 말고는 도통 나올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18년쯤 지나 2023년 말쯤 다시 해본 검사는 INFP와 INTP가 나왔다. 둘 중 근소하게나마 INTP에 더 가깝다고 정리했다. 모든 질문을 분석하고 하나씩 꼼꼼하게 고민하여 검사를 했을 때는 근소하게 INFP가 나왔고, 즉흥적으로 휙휙 풀어넘기며 검사했을 때는 근소하게 INTP가 나왔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INFP고, ‘현재 실제 나의 모습’은 INTP라고 생각했다. 여담으로, 예전에는 항목이 네 개뿐이었는데, 최근에는 다섯 번째 항목도 생겼더라. 그래서 정확히는 INTP-A다. 재밌는 것은, 각각 70대30, 55대45식으로 뒤섞여 있는 다른 항목과는 달리, A만 홀로 100%다. 그리고 예상컨대 이것만은 2005년도에 검사했어도 같았을 것이다.


20년 전 열아홉의 나와 지금 서른아홉의 나는 여전히 N과 P가 동일하다. 하루 중 대부분을 생각 속에 잠겨있고, 여전히 꼼꼼한 계획성보다 느슨한 무계획성을 즐긴다. 다만 같은 P여도 여행 방식만큼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스물 무렵의 나는 일단 목적지가 정해지면 계획 없이 출발했다. 때로는 목적지조차 없이 일단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기도 했다. 이르면 어딘가를 향해 가면서, 보통은 어딘가에 도착하고 나서야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런 성격은 예상 못한 정기휴업이나 임시공사 같은 시기와 겹쳐서 목적 자체를 잃어버릴 때도 있다. 또는 그 주변에 내가 더 좋아할 법한 장소가 있었음에도 돌아오고 나서야 알아채는 경우도 있다. 다만 모든 성격은 장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듯이 나는 그런 단점을 감수하면서도 예약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편안함, 언제든지 노선을 변경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그 와중에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는 신선함 등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여행을 다녔음에도 딱히 아쉬움이 없었다. 여정을 함께 했던 이들도 나와 비슷한 성격이어서 문제가 될 일도 없었고.


반면 서른아홉 P의 여행은 약간 다르다. 이제는 떠나기 전에 대략적인 계획은 머릿속에 세워두고 간다. 어느 동네를 갈지, 가서 무엇을 할지, 어떤 장소에 들릴 것인지 등등. 어떤 카페에 갈지 미리 알아보지는 않지만 카페에 가야겠다고는 생각하고, 맛집을 미리 찾아보지는 않지만 식사를 커피 마시기 전에 할지 후에 할지 정도는 정해놓고 움직인다. 다만 이렇듯 P와 J가 뒤섞여 있는 중에 중요한 것은, ‘계획 변동에 대한 부담’이다. 카페에 갔다가 밥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밥을 먼저 먹게 되었을 때, 그 변동이 마음에 불편함을 준다면 J에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어딘가에 먼저 들렸다가 이후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보여 밥부터 먹게 되었을 때 그 변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끼면 P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후자여서, 대략적인 계획에 나온 목록은 이번 여행 전체 과정에서 한 번쯤 해볼 법한 일들일 뿐이다. 순서와 상관없이 여행 일정 중에 언제고 한 번만 하면 되는 것들이고, 심지어 다른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끝까지 하지 못한다 해도 아쉽지 않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 아니니 다음 여행 때 하면 된다. 두 번 오기 쉽지 않은 장소고,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동네라면 다른 일 하지 않고 그냥 하면 될 일이고.


2005년 당시 P의 여행은 J와 함께 다니기 참 힘든 여정이었다. 나는 너무 즉흥적이고,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것을 답답해했으니까. 물론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했어도 예상 못한 변수로 일정이 크게 어그러졌을 때 낙심하고 혼란에 빠진 J를 달래고 추스르는 역할은 잘 할 수 있었지만 J에게 도움 되는 P의 장점은 그뿐이었다. 반면 2025년 P의 여행은 너무 극단적인 J만 아니라면 J와도 그럭저럭 여행을 다닐 만했다. 계획대로 하는 것도, 계획대로 하지 않은 것도 모두 무계획 중에 하나라고 여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시간이 없다, 급하다, 빨리 이동해야 한다, 라는 식으로 너무 쪼아 붙이지만 않으면 스무 해를 더 산 나는 J의 계획에 군말 없이 맞춰주는 꽤 훌륭한 P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 성향은 다른 P와의 여행에도 도움이 된다. P와 P의 여행은 일정 도중에는 우선순위가 있어서 생기는 불편함보다, 우선순위가 없어서 생기는 선택장애가 더 발목을 잡고는 했으니까. 2005년도에는 P끼리 여행을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안 하게 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뭐할래?' '너는?' '나는 뭐든 좋아.' '나도.'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 그럭저럭 가깝고 편하고 쉽게 손이 가는 것을 하게 되는 일도 P들끼리의 여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점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대략적으로 계획 비슷한 것을 세우고 출발한다고 해서 계획대로만 할 리가 없다. 그러면 P가 아니었겠지. 이런 여행에서도 P인 두 명은 하고 싶은 것과 순서가 수시로 바뀐다. 카페에 가던 중이었는데 누군가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자고 한다. 마침 저기 저 집이 맛있어 보인다고 한다. 혹은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고 한다. 어느 P의 제안에 나머지 P가 '좋아!'라고 응답하면 카페 가려다 밥을 먹으러 가면 된다. 둘 중 어느 누구도 계획대로가 아니라고, 순서가 바뀌었다고 불편할 리 없다. 반대로, 어느 P의 밥부터 먹자는 제안에 다른 P가 카페에 먼저 가고 싶으면, 카페를 먼저 가면 된다. 계획 없이 온 P들은 서로 갈린 의견 중에 우선순위가 없기에 이쯤에서 배려가 길항한다.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하기 어려워지고, ‘너 좋을 대로 해’나 ‘아니야 너 하고 싶은 거부터 하자’라는 이상한 양보와 함께 달리던 자동차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즉, P의 여행에서 '대략적인 계획'이란, 계획이라기보다 '변수가 생겼을 때의 우선 순위'에 더 가깝다. 그 대략적인 계획을 가지고 왔다면 여기서는 무조건 원래 계획을 주장하는 P쪽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미리 합의해놓는 것과 같다. ‘밥부터 먹을까?’라는 말에 ‘난 카페 먼저 가고 싶은데?’라는 반대가 더 우선되기에 여기서는 서로 과한 양보를 할 필요가 없다. 본심을 숨기는 것이 배려가 아닌, 오히려 밝히는 것이 배려가 된다. 내가 즉흥적으로 계획을 바꾸자고 했는데 상대가 계획대로 하자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 이렇다면 나는 P의 자격이 없다. P의 가면을 쓴 이기주의자 일뿐이다. 진짜 P들은 이런 상황에서 미리 합의한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여행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너무도 잘 알 테니까. 그래서 의견이 갈렸으면 원래 계획을 주장하는 이를 군소리없이 따른다. 도중에 계획을 바꾸는 것에 동의하는 일이 즉흥성이라면, 계획을 바꾸자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역시 즉흥성이니까. 어느쪽도 P에게는 상관없다.


다만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파져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쓰려오기 시작했다면 ‘선생님, 사장님, 제발 저 지금 너무 배가 고파졌어요. 부탁드립니다.......’라며 싹싹 빌면 된다. 보통이라면, 그리고 이전에 나쁜 전적이 없는 관계라면 그 정도 손짓발질에는 풀썩 웃으면서 ‘그래, 밥부터 먹자’라고 핸들을 돌릴 것이다. 이 정도면 ‘선생님 갑자기 배가 아파요, 뭐가 됐든 곧 나올 것 같아요.’와 비슷한 수준일 테니까.


제멋대로인 이기주의와 P는 엄연히 다르다. 융통성 없는 강박과 J가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





25. 02. 1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공의신년恭擬新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