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매]
빨대 논쟁의 핵심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 인식은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대상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비대칭, 서로 다른 점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재질과 모양, 완성도와 가격까지 완전히 동일하여 서로 대칭된 프라이팬 두 개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우리가 구별할 수 없듯이 말이다. 대신 내가 그 프라이팬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으면 그 비대칭된 프라이팬 중에 어느 쪽이 왼쪽 프라이팬인지는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 몸통에서 왼쪽으로 뻗어 나온 손이 들고 있는 프라이팬이 왼쪽 프라이팬이니까. 그만큼 대상을 구조로든 기능으로든 구분할 수 있는지는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비대칭이 구분을 가능하게 하고, 구분이 인식을 다르게 한다. 그러면 구조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다른 인식은 하나를 둘로 여길 수 있다.
그래서 반지의 구멍이 하나라고 빨대의 구멍도 반드시 하나인 것은 아니다. 모양이 비대칭이라 대상을 위와 아래라는 구조적으로, 그리고 음료에 닿는 쪽과 입에 닿는 쪽이라는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빨대는 구멍이 두 개다. 머리 부분을 구부릴 수 있게 주름이 잡혀있는 모양의 아메리카노용 빨대나, 포장을 뚫고 꽂기 위해 한쪽만 비스듬히 자른 바나나우유용 빨대나, 아니면 작은 스푼이 달린 듯한 모양의 빨대 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런 빨대를 수평으로 눕혀놓고 ‘어디가 위야?’라고 묻는다면 누구도 구부러진 쪽을 가리킬 것이다. ‘어디가 아래야?’라고 묻는다면 비스듬히 잘린 쪽을 아래라고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스푼 빨대를 건네주면서 ‘아래쪽에 오염물이 묻었으니 위쪽 구멍 쪽을 잡고 쓰레기통에 버려줘’라고 한다면 건네받은 상대는 빨대 구멍이 하나라고 생각하든 두 개라고 생각하든 스푼이 위치한 곳의 반대쪽을 잡고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반면 원통형 빨대는 아무런 특징이 없기에 비대칭이 아니다. 빨대의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없고, 음료에 닿는 곳과 입에 닿는 곳을 구별할 수도 없다. 이 빨대를 옆으로 눕혀놓고 ‘어디가 위야?’라고 묻는다면, 누구도 어느 쪽이 위라고 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구조적이든 기능적이든 차이가 없어서 대상의 부분을 별개로 인식할 수 없다면 이 빨대의 구멍은 하나다.
반지의 구멍이 하나고, 빨대의 구멍이 두 개인 것은 크기나 길이의 문제가 아니다. 빨대보다 긴 키친타월 구멍도 하나고, 그보다 훨씬 크고 긴 강철 코일 구멍도 하나지만, 코일보다 긴 우수관은 물이 항상 위쪽으로 들어가 아래쪽으로 나오니 구멍이 두 개고, 출구와 입구가 정해져 있는 세탁기 호스의 구멍도 두 개인 것처럼 말이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입구와 출구처럼 구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두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다.
나는 비대칭, 구분, 인식, 이 세 가지를 빨대 구멍이 두 개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근거로 인해 나는 내 주장이 옳다고 여긴다. 다만 당연하게도, 내게 옳음을 주는 이 근거가 상대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니 빨대 논쟁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원통형 빨대를 떠올린 이가 구멍이 하나라 주장하는 것은 옮고, 구부러진 빨대를 떠올린 이가 구멍이 둘이라 주장하는 것 역시 옳다. 그러니 핵심은 내가 근거를 찾아서 내 주장이 옳다고 여겼듯이, 상대가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길 만한 근거를 내가 생각해 보았는지다. 그것을 찾았다면 이 논쟁은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고, 상대의 근거를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다면 내 주장만 옳고 상대는 틀린 것이 되어버린다. 거기에 우리가 중력의 영향을 받는 세계에 살고 있는지, 그래서 음료는 대부분 입보다 낮은 위치에 두고 마시는지, 그래서 모양이 대칭적이지 않은 빨대에 위와 아래라는 인지가 생기는지, 구멍을 ‘물체가 통과할 수 있는 원’이라 가정했을 때 하나의 긴 구멍을 구조와 기능에 따라 둘로 나눠서 인식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하등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내 주장만 맞고 상대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이것은 마치 엉덩이가 한 짝인지 두 짝인지, 깻잎을 떼어줘도 되는지 안 되는지 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 주장의 근거가 있듯 상대 주장에도 근거가 있을 거라 가정하는 것. 그래서 나와 다른 주장의 근거를 찾아보는 것. 찾았다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까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틀린 생각은 없다. 살아가는 과정은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을 걸러내는 과정이 아니라, 나와 다른 근거를 가지고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내가 상대의 근거를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 두 과정은 결과만 잘라보면 같은 맥락처럼 보이지만, 과정은 전혀 다르다. 달라진 과정만큼 우리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달라진 시선만큼 우리도 다른 삶을 살게 된다.
25. 0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