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매]
거울을 볼 때면 종종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만약 언젠가 범죄자가 된다면, 이것은 사상범의 눈이구나. 거울 너머로 보이는 저 눈깔은 도무지 잡범은 될 수 없는 눈이구나, 하고. 살면서 강도짓으로 남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사기나 횡령으로 타인의 재산을 편취하거나, 부당한 피해를 입히는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삿된 거짓말로 이권을 챙기는 등의 잡스러운 범죄는 저지를 수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기름 실은 트럭을 몰고 어느 건물 기둥을 들이박거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목을 조르거나, 긍지와 신념을 위해 몸에 불을 붙이고 어딘가에서 뛰어내릴 수는 있겠구나, 하고.
그래서 주변에 종종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근처에 이런 눈을 하고 있는 이가 있으면 평소에 잘 구별해놓으라고. 이런 이들은 주변의 시선보다 자신의 기준을 더 선호하고, 사회의 법보다 자신의 초법적 신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법이 강제하지 않아도 자신의 기준에 벗어난다면, 보는 눈이 없는 오밤중에도 담배꽁초 하나 바닥에 버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서 사회에 별다른 일이 없는 평시에는 가까이 하기 좋은 이다.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무해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라가 혼란스러운 전시에는 되도록 멀리 하라고 했다. 근처에 있다가 자칫하면 예상 못한 전화에 휩쓸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타인의 규칙보다 중요한 가치나 신념이 생기면 도무지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할 수 없는 이가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이에게 자신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두 가지를 골라보라 하면, 아마 다음과 같은 단어가 나올 것이다. 하나는 평생 심장 바로 곁에 품고 있을 ‘긍지’일 테고, 다른 하나는 의외로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명예’가 튀어나온다.
긍지와 명예는 출발지가 같으나 도착지가 다르다. 긍지는 나에게서 출발하여 나로 하여금 완성되는 나만의 문제다. 반면 명예는 나에게서 출발하여 타인의 인정으로 완성되는 나 외의 문제다. 긍지는 스스로 세우거나 꺼트릴 수만 있지, 타인은 훼손하거나 깎아내릴 수 없다. 명예는 타인이 깎아내리거나 훼손할 수 있지, 스스로 세우거나 꺼트릴 수 없다. 그에 내가 어떤 누명을 입어서 매도당한다면 그들이 깎아내리는 것은 내 명예지, 결코 긍지일 수가 없다. 스스로 당당하다면, 자신의 기준에 맞춰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긍지에 손 댈 수 없다. 긍지란 오직, 스스로 자빠져서 똥통으로 처박기 전에는 살아오며 지키려 노력한 만큼 여전히 고고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간이, 매체가, 여론이, 길 가다 마주친 손가락들이 내게 무슨 욕을 하고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나는 여전히 긍지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명예는 그렇지 않다. 명예란 나에게서 출발했지만 나로 인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단지 매개체일 뿐, 내게 평가를 보내는 그들 각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긍지를 잃었다는 타인의 평가는 바람소리보다 가치가 없다. 네가 평할 일이 아닌데 주제를 모른다며 그저 비웃을 뿐이다. 반대로 내게 명예를 잃었다는 타인의 평가는 내 동의와 관계없이 우선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은 내 어떤 모습을 보고, 스스로에게 비추어 어떤 평가를 내렸기에 애초에 내게 명예가 있다고 여겼을까. 게다가 이제는 어떤 일로 그것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걸까. 그 연유는 모르지만 이것은 당신의 판단 영역이니 나는 우선 존중한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내게 명예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긍지에 비하면 하잘 것 없이 비루하지만 명예 자체를 홀로 두고 봤을 때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내게 그것이 중요한가?’ 아니다. 나는 명예의 위치가 위든 아래든 그것으로 상처받을 일은 없으니. 그렇다면, 그 평가로 인해 ‘내 주변인이 상처 받는가?’
내게 영향이 없을 명예에 대해 내 의식이 이리 오래, 많은 정념으로 묶이는 이유는 이것뿐이다. 이것이 내 주변을 해치는가. 만약 그렇다고 판단되면, 누명에 의해 떨어진 명예가 주변을 해친다면, 다시 말해 이 일로 내 주변이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거나 직접적으로 손가락질 받는다면, 이때도 명예는 내게 가치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누명으로 명예가 떨어지는 (내게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 스스로의 긍지를 훼손한 것만큼 중요한 일이 된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합법적인 노력을 다 했음에도 여전히 누명을 벗지 못해 명예가 훼손된 상태라면, 거짓말로 누명을 씌워 나(실상 내 주변인)를 공격한 이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 것인가. 스스로 긍지를 저버린 나를 보며 내가 ‘어떡하면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듯, 거짓말로 내 명예를 훼손한 너를 보며 역시 ‘어떡하면 너를 죽이지 않고 용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 지나온, 지나가는, 지나갈 모든 삶에서 자신의 의지로 타인을 해할 가능성은 오직 이것뿐이다.
스스로 긍지가 높은 사람은 놔두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무해하다. 그런 이는 법보다, 타인의 시선보다, 세상의 잣대보다 중요한 스스로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로인해 혹여 손해를 보고, 에둘러 가고, 포기하고 놓치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으니 그 과정을 애써 걸어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혹시 어느 날 세상이 내가 어떤 잘못을 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조차 없이 책임 없는 손가락질을 하고 싶다면 그때는 나에게만 욕하면 된다. 내가 선 곳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어 놓고 그 안에만 돌을 던지면 된다. 추후 그것이 결국 거짓이고, 그래서 누명이라고 밝혀진다 해도 나는 ‘사람이란 원래 그러니까, 그렇게 설계된 생물이니까’라고 생각하며 내게 눈먼 돌을 던진 생물들을 원망하지도 않고 보복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내 주변 누구도 이 일로 다치지 않았다면, 나는 내게 거짓으로 공격한 그 당사자 역시 결국은 용서할 수 있다.
법을 어기는 것은 무섭지 않다. 그것은 살면서 내내 무섭지 않았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법을 어기는 것은 무섭고 중요한 일이지만 내가 걸어온 지난날은 그것이 가장 무섭고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법을 어기고 살지 않았던 이유는 법이 그러라고 강제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나로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고,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끔찍했고, 나로 인해 사랑하는 주변이 다치고 피해 입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살았다.
나는 현재 위험한 시대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 평시도 전시도 아닌 혼란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대로 살고 있어도, 어느 날 누군가의 거짓으로 얼마든지 위험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계속 두렵다. 고민하고 또 생각해봐도 말끔한 결말이 나오지 않아서 내내 두려워하고 있다. 감옥에 가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은 두렵지 않다. 스스로 긍지를 잃은 일에 비하면,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두려워질 수 없는 일이다. 애당초 그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으면,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회적이고 사교적으로 살고 있었겠지. 지난 내 인생의 여러 변곡점과 갈림길에서도 보다 많은 사람이 밟는 과정과 무난한 선택을 했겠지. 여전히 좋은 친구나 오빠동생으로, 남들에게 자랑하기 쉬운 자식으로, 걱정 없이 증손자를 보여드리는 손주로 살고 있었겠지. 그러니 내가 진정 두려운 것은 나를 거짓으로 공격하여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준 상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할까봐, 그것 하나뿐이다.
내게는 티끌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명예를 공격한 사람인데 왜 용서하기 어려울까. 긍지가 아닌 명예인데, 용서하든 하지 않든 내 주변 사람이 받는 피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가짜 범죄자의 가족에서 진짜 범죄자의 가족이 되어 이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내가 어떤 누명을 쓰고 어떤 공격을 받아 명예가 떨어져도 결국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이득임에도 나는 왜 선뜻 그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까.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것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너도 그에 준하는 것을 걸어라.’
이 한 줄의 문장을 내가 가진 긍지로 여기는 일이, 이전 내가 긍지를 만들던 과정에 적합한가. 아니면 복수심에 밤새 뜬눈으로 보낸 생물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해서 도출한 변명인가.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은, ‘인생을 살면서 본의 아니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고 입히는 와중에 결국은 상대를 용서하고 끝내 상대에게 용서받는 사람’이다. 그에 맞춰 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을 종래 얼마나 용서할 수 있을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악의로 무장한 채 가볍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스스로의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을, 남이 자신의 팔뚝을 꼬집으면 애새끼처럼 비명을 지르지만 타인의 팔은 아무렇지 않게 자르는 사람을, 나는 무슨 생각을 더 부여잡아야만 길고 긴 밤 끝자락에서야 겨우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2022. 0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