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가위: 인색하게 제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19매]
[선택 0. 둘 중 하나]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손해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방어기제를 가졌고, 다른 사람은 손해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억제하는 방어기제를 가졌다. 한 사람의 이름은 ‘호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갈가’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선택 1. 스스로를 속이는 방어기제]
호구는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챙겨줄 때 잡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때 잡힌다. 그래서 이 구분을 하지 않았을 때의 흔한 실수는, 상대에게 더 배려할 수 있음을 깨닫고도 ‘호구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는 방어기제로 그 깨달음과 배려를 애써 무시하는 일이다. 정작 무시해야 하는 무리한 부탁은 잘 거절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무리한 부탁’의 정의는 무엇일까. 무리한 부탁이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이 터무니없이 적음을 알지만 여러 이유를 붙여 그 보상을 스스로 과장해야만 들어줄 수 있는 어떤 일이다.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원망, 갈등, 감정 등등 그로 인해 생겨낼 변화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보상을 과장’하는 근거 또한 단순하다. 손해 본다는 느낌 없이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저울추 양팔 중 위로 치닿은 한쪽에 ‘가상의 보상’을 올려두어야만 무게가 맞기 때문이다. 아직 받지 못했고 앞으로 받는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막연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하는 가상의 보상을 말이다. 그 보상을 받아낸다면 다행히 무리한 부탁은 그냥 부탁으로 변할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확언 없는 보답이 그렇듯, 마치 줄 것 같은 뉘앙스만 풍길 뿐 실제 손에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무리한 부탁을 수용한 결과는 대게 이렇다. 부담스럽다가, 수용했다가, 후회했다가, 짐작했다가, 결국 실망으로 끝이 난다. 여기서 다음 부탁을 거절하겠다고 강하게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은 ‘선택 2’로 넘어간다. 반면 거절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끝내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비로소 ‘선택 1’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리한 부탁’일까. 첫째, 해야 하는 일에 비해 받게 될 보상이 작다고 느낀다. 둘째, 요청을 승낙할 때도 수행할 때도 기분이 말끔하지 않다. 셋째, 확답 없이 짐작으로만 부족한 보상이 이후 보충되리라 기대한다. 이 세 가지를 충족했다면 나는 지금 누군가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중이다. 그렇다면 현재 내 마음이 어떠하든, 내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든, 상대는 나를 어떤 속내로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나를 어떠한 이로 취급하고 있을까.
[선택 2. 스스로를 억제하는 방어기제]
갈가는 상대의 무리한 부탁을 더 이상 들어주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혹시 호구 취급을 당할까 싶어서 무리한 부탁뿐만 아니라, 과한 부탁도, 선을 넘은 부탁도 모두 들어주지 않는다. 이렇게 갈등, 원망, 감정 등을 이겨내고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게 되면, 그 ‘무리한 부탁’에도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보상을 더 줄 수 있음에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여긴 ‘과한 부탁’이고, 다른 하나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어서 상대적으로 부탁이 커진 ‘절박한 부탁’이다. 이런 사람이 가진 특징은, 부탁을 거절함으로서 이 둘을 구별할 능력을 가지게 됐지만 실상은 구분하지 않고 모두 거절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내게 무리한 부탁을 했을 때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단지 무리하다는 이유로만 거절한다면, 내가 실수를 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상대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없다. 물론 평생 실수 한 번 없이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 그래서 상대가 내 무리한 부탁을 들어줄 필요 없다면 상관없다. 다만 누군들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리한’이란 무엇일까. 반대로 ‘절박한’이란 무엇일까. 관계에서는 정도를 측정할 때 두 가지 기준을 사용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지금 상대의 요청이 과한가 아닌가, 이렇게 외부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 두 번째는 지금 상대의 요청을 내가 (말끔한 기분으로)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렇게 내부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 대부분의 섭리가 그렇듯이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 두 가지 이상 있다면 모든 상황에서 우월한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상황에 따라 할 수 있음에도 무리한 부탁이기에 거절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과하지만 절박한 부탁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섭리로써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를 억제하는 방어기제 탓에 관계의 모든 부탁을 외부 기준 하나로만 판단하게 된다.
[선택 3. 가타부타]
그간 나는 이 두 가지를 깨닫고, 정리하고, 사상으로 정립하고서는 상황에 맞춰 번갈아가며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깨달았으니 알아서 그러리라고 여겼다. 무리한 부탁은 단칼에 거절하고, 절박한 부탁은 되도록 응하면서. 실제 한때는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본 지난 몇 년 간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내적 기준이 아닌, 요청이 과한지 아닌지의 외적 기준으로만 주변을 대했음을 알게 됐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고민이나 공감 없이, 너무도 쉽고 빠르게, ‘선 넘네’ ‘과하네’ ‘내가 왜?’라며 한 가지 방식으로만 상대의 부탁을 판단해왔다. 그렇다면 반대 경우에도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야 했다. 지난 몇 년간 그리 살아온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도 내 절박한 부탁은 무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구에게도 승낙 받지 못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주변 모든 이가 나 같지는 않았다. 그중 누군가는 내 무리한 부탁을 외적 기준이 아닌 내적 기준을 적용하여 절박한 부탁으로 여겨준 이가 있었다. 그가 나를 도와준 이유는 내 부탁이 과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당시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손해일지언정 말끔한 기분으로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들어준 것이었다. 그런 이에게 짝이 맞지 않은 신세를 지고 나서야 나는 오랜만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그간 나는 당신처럼 그러고 있었는가. ‘나도 알아’라며 당연히 알던 것을 당연하게 실천하고 있었나. 내가 깨닫지 못하는 동안 나는 상대의 부탁이 과하다는 이유로, 선을 넘었으니 무시당했다는 생각으로, 이러다 호구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얼마나 많은 간절함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왔을까.
‘남을 돕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하지만 ‘도울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돕지 않는 것’은 ‘도울 수 없어서 돕지 못한 것’에 비하면 어떨까.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하지 못한 것’과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선악에서 벗어나 있는가.
걷고 걸어도 갈 길이 구만리다. 멀리서 보면 이만큼이나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가까이서 세세히 살펴보면 나는 여전히 짐승의 터럭조차 벗지 못했다. 그간 나는 간솔하게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간묵하지만 다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느 때는 쉽기만 한 호구로, 다른 때는 상대를 만나면 까다롭게 날을 세운 채 관계의 무게부터 먼저 재는 갈가가 아니었나.
[선택 4. 둘 다]
그래. 애석하게도 두 사람 다 나였다.
2022.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