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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승님의 두 가지 가르침

[11매]

by 이한얼






[첫째, 내 일의 범위]


1930년대에 태어난 보수적인 분이라 이건 내 일, 저건 네 일, 이건 누구라도 하면 되는 일, 이 구분이 굉장히 강했다. 보통 이 구분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 일’의 범위는 작고 짧았다. 그런 이는 작은 일을 하면서도 크게 인정받으려 하고, 누구라도 하면 되는 일은 되도록 남을 시키려 하고, 짧은 내 일만 하면 도리를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헌데 그 분은 왜인지 내 일의 범위가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하면 되는 일은 되도록 스스로 많이 하셨다. 그리고 본래의 내 일에 대해 생색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내가 평생을 본 친할아버지는 늘 바쁠 정도로 부지런하셨다. 언제나 뭔가를 하고 계셨고, 잠시 가만히 앉으셨다가도 금세 돌아보면 다른 곳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이게 따라 시작하기에는 쉽지만, 끝까지 꾸준히 잘하기는 어려운 첫 번째 가르침.






[둘째,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


나는 포괄적으로 나누자면, 친할아버지께 주로 공간을 다루는 방식을, 아버지께 주로 시간을 다루는 방법을 대물림 받았다. 할아버지는 뭐랄까,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공간 자체를 유기적으로 대하고 활용하시는 분이었다.


할아버지 집에는 구석구석 물건이 참 많았는데 그 모든 것이 단지 쌓여만 있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여기 빈 공간이 있기에 거기 물건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살아온 과정과, 하루를 보내는 방식과, 함께 사는 할머니의 습관과, 당신의 호불호와 취미와 특기와, 물건 간의 유사성과, 순서에 대한 필요성과, 사용에 대한 편의성 등을 당신의 오랜 경험과 전체적인 깨달음을 통해 배치해 두셨다. 그래서 보통의 ‘건물로 된 집이 있고 그 안에 짐을 둔다’가 아니라 ‘내 생활을 이루는 물건으로 집을 짓는다’의 느낌이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무엇이 필요해지면 멀지 않은 곳에 그것이 있고, 그 일을 하다가 다른 무엇이 필요하면 또 근처에 다른 것이 있다. 그 배치의 조화가 복잡하지 않아 거기 살고 있지 않은 나조차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그 단순함이 전체적으로 오묘한 안정감과 편리함을 줬다. 이건 뭐랄까, 단순히 똑똑하거나 배웠다고 가능한 것이 아닌 그 분야의 재능과 오랜 깨달음이 결합되어야 가능한 일인 듯하다. 그래서 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지으신 집과 그 안에 두신 물건만 봐도 내가 겪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생애를 슬쩍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집과 물건뿐만 아니라, 가족이 모였을 때 앉아 계신 자리, 앉아 계신 모습, 대화를 할 때 상대와 취하는 거리도 그렇고, 길을 걷는 습관,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 등 어떤 공간에서든 할아버지는 마치 잘 만들어진 암호 상자처럼 내 기억에 떠오를 때마다 어떤 깨달음을 주시고는 한다.


아, 이 분은 본능적으로 공간을 잘 다루는 사람이구나. 막연히 어느 공간 위에 내가 올라타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자리와 내가 서로 보완하며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이 겹치는 거구나. 마치 시간도 그렇듯이, 공간 역시 내가 파악하고 다루는 만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겠구나.


이것이 따라 하기에는 아직 요원하지만, 어느 날 깨달으면 조금은 쉬워질 두 번째 가르침.






할아버지께서는 살아생전 내게 단 한 번도, 일의 범위나 공간을 다루는 법에 대해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만나면 그저 잘 지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동생을 잘 돌보고 있는지,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하고픈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그렇게 매번 같은 것만 물으셨다.

대신 다른 말씀 없이 평생을 행동으로, 직접 드러내는 등으로만 저 모든 것을 보여주셨다. 어느 순간 굽고 좁아진 등을 보며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할 때쯤 내 곁을 떠나셨고, 이후 종종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하나씩 더 깨닫게 하시는 그 모든 것은 이내 부스러져 사라질 말이 아닌 내내 그림처럼 남을 행동으로 남겨두셨다.






가정교육은 정말, 정말 중요하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갈수록 세상 그 어떤 교육보다, 어떤 교육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가장 중요하다 싶다.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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