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에 대한 개인적인 짧은 생각 [15매]
나는 외래어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텔레비전, 포크, 케밥, 오뎅처럼 굳이 대체할 순화어나 한국어를 만들 필요 없이 외래어 자체로 받아들이면 되는 경우
- 이런 외래어는 보통 외래어에 대응하는 한국어가 없다. 우리나라에 없던 물건이나 문물이 수입된 경우니까. 그래서 굳이 영상송수신기, 삼지가락, 터키식 고기전병 등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본다. 외래어가 가진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며 원래의 발음으로 단어를 사용해도 된다. 우리 역시 외국인이 불고기, 김치, 비빔밥, 떡볶이라고 한국어 그대로 불러주기를 원하듯이. 떡을 '라이스 케이크'가 아니라 '떡'이라고 인식해야 의미와 느낌이 바르듯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오뎅’은 ‘어묵을 넣고 끓이는 일본식 탕 요리’의 의미다.
2. 오뎅(어묵), 다꽝, 아시바, 나와바리처럼 되도록 한국어로 바꾸거나 순화하면 좋은 경우
- 외래어에 해당되는 한국어가 이미 있지만, 우리 의도를 벗어나 한국어 대신 외래어만 쓰도록 강요받은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겨진 외래어는 다시 한국어를 써야 한다고 본다. 만약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면 되도록 순화어를 만들어서라도 바꾸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첫 번째 경우와 다른 이유는 하나뿐이다. 단어가 자연스럽게 수입되었는지, 아니면 외력에 의해 강제되었는지. 그래서 아무래도 일본어가 많다.
3. 이미 평생을 목소리, 나이, 분위기라는 한국어를 잘만 쓰면서 살아와놓고 갑자기 어느 날부터 보이스, 에이지, 무드라고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우
- 갑자기 무슨 멋이 들었는지, ‘사대주의’라는 네 글자를 빼면 도통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행동이다. 나는 첫 번째 경우는 응당 자연스러운 일이고, 두 번째 경우는 그러면 좋겠고 아니면 아쉬운 일이지만, 세 번째 경우만큼은 혐오한다. 한국어 대신 외래어를 쓰는 일이 ‘지금 당장’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끼치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내 기준에 의해, 이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시류, 추세, 풍조, 세태가 ‘장기적으로’ 현 세대와 다음 세대가 사용하는 한국어에 부당한 피해를 끼치는가?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음에도 쓰는 외래어’는 싫어한다. 그 사용자가 일반인이라면 비난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다. 뭐 그럴 수 있지. 본인의 자유인 것을. 아주 넓게 봐서 영리적인 활동을 하는 기업까지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이익을 내야 하니까. 소비자가 좋아하면 양잿물로도 샤워를 해야지. 다만 그 사용자가 나라의 얼굴인 정부, 기관, 공기업이라면? 그리고 나아가 사람들의 언어를 규정짓고 정돈해주는 방송인, 언론인이라면? 그리고 끝내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창작자, 예술가, 작가라면? 물론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것이다. 외래어를 쓰는 것이 불법은 아니니 강요할 수도 없다. 다만 스스로에게 그리 물어보고 싶다. '나는 내가 받은 권리만큼 의무를 다 하고 있나?'라고.
어쩌다 보니 하필 전세계에서 그 출처와 시기와 만든 이와 목적까지 명확히 밝혀진 유일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 언어는 비할 바 없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언어고, 입말로도 글말로도 유려하고 아름답다. 표현과 의미가 아주 풍성해서 번역가들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고작 몇 십 개의 기호뿐이라 컴퓨터든 스마트폰이든 사용하기 쉽고 빠르다. 한때 다른 나라에 의해 빼앗기고 사장될 뻔도 했으나 광복 이후 우리말바로세우기 운동을 통해 나는 이만큼 정돈되고 편리한 언어를 지금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런 한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한국어가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한국말이 촌스럽지 않다고 느끼며, 무엇보다 그 말과 글로 밥을 벌어 먹고 자아실현을 하며 사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직 나만의 노력이고 결과인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내 후손 역시 최소한 나보다 덜 누리면 안 된다. ‘즐’이든 ‘OTL’이든 새 단어를 만들 수 있지. ‘버카충’이든 하다못해 ‘느좋’ 같이 도대체 왜 줄여야 하는지, 줄였더니 발음이 더 안 좋아지는 것을 왜 굳이 써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줄일 수도 있지.
허나 외래어는 그와 별개다. 한국어가 이미 있는데 굳이 외래어를 쓰는 일은 신조어나 줄임말과는 아예 궤가 다르다. 외래어를 쓰면 비싸게 느껴지고 한국어로 하면 싸게 여겨지고, 외래어를 쓰면 있어 보이는데 한국어로 하면 촌스럽게 느끼지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평생 한국어를 써온 우리야 ‘뭐가 문제야?’ 싶지만, 태어나 보니 주변 한국인이 죄다 한국어 대신 외래어를 쓰는 세상일 아이들에게는 더욱 다른 문제다. 그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한국어를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근거가 어디 있을까. 언젠가 아이폰뿐인 교실에서 혼자 갤럭시를 들고 간 아이처럼 ‘한국말 쓰면 애들이 놀려 우앙 ㅠㅠ’ 하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이유는 그래서다. ‘지금 내가 나이 대신 에이지라고 말하는 것이 힙하고 영하고 쿨하고 있어 보이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음색이 독특하다고 말하는 대신 보이스가 유니크하다고 말해야 내 의사가 더 잘 전해지는가?’ 역시 그렇지 않다.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글 한 토막 제대로 적을 수 없는가? 지난 20년 동안 한국어로 잘만 써왔다. 그렇다면 나는 왜 한국어보다 외래어를 더 중시해야 하는가? 남들도 다 그러기 때문에? 왠지 나만 뒤처지거나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에? 아니면 정말로 외래어보다 한국어가 없어 보이고 촌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굳이 외래어를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여겨진다면, 더더욱 쓰면 안 된다. 나조차 벌써 한국어가 외래어보다 촌스럽다고 느끼는데 나보다 열 살 어린 이는 더, 스무 살 어린 이는 더욱, 서른 살 어려서 이제 말을 배우는 아이는 더더욱 그리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고립권리가 아닌 대립의무다. 이전 세대에게 좋은 언어를 물려받은 것이 내 권리라면, 그에 대응하여 언어를 다음 세대에게 촌스럽지 않도록 전해주는 것은 말을 다루는 이로서의 내 의무일 것이다. 내가 글쟁이여서가 아니다. 내가 설령 글 한 줄 쓰지 않는 목수였다 한들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작가나 방송인이 아니어도 말을 다루는 이다.
2025. 04. 10. 00:31
https://brunch.co.kr/@e-lain/118
(아이고 은수야... 이딴 글이나 싸지르니까 아직도 인기가 없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