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점의 평시화

[28매]

by 이한얼






[첫 한 줄]

새벽 한 시에 조각 피자 두 개를 먹었다. 뭐, 어차피 먹을 거면 새벽 세 시에 먹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




[고점의 평시화]

시간은 한 시 20분쯤이었다. 당시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근데 왠지 세 시쯤이 되면 입이 구쁠 것 같았다. 참고 잠들면 된다. 헌데 왠지 핑계를 붙여 뭐든 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차피 먹는다면 조금이라도 이른 시각에 먹자 싶었다. 그래서 배가 고프지 않고, 입고 구쁘지 않음에도 조각 피자 두 개를 돌렸다. 이 와중에 한 개가 아니었다.

여기서 스스로를 가볍게 놀릴 수 있는 부분은 세 가지다. 첫째는 아직 입이 구쁘지 않음에도 그럴 것이라 지레짐작한 점. 둘째는 참으면 되는데 그러지 못할 것이라 미리 포기한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지레짐작과 포기로 긴불긴간에 음식을 먹고는 마치 합리적인 척 포장한 점이다. 여기서 정말 합리적인 선택은 새벽 세 시에 정말 입이 구쁠지 확인하고, 만약 그렇다면 참을 수 있는지 시도하고, 참지 못하겠다면 그때 먹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부터 새벽에 입이 구쁠 때 참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여 준비하는 것, 이것이 정말 합리적인 과정이다.

오늘 이 과정을 보며 스스로를 조롱하는 이유는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자신을 속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먹고 싶고, 참지 못했으면 그냥 먹으면 된다. 그에 괜한 핑계를 붙일 필요가 없다. 억지로 합리적인 척 포장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자기기만이 거듭 다양할수록 역한 생물이 된다. 거짓 합리화는 마치 씻지 않고 향수를 뿌리듯 역한 냄새를 가리려는 눈속임이다. 본디 자신의 냄새를 맡기 어렵도록 코를 점차 피로하게 할 뿐이다.

오늘 있었던 일에서 보다 합리적인 길은 새벽 세 시쯤 속이 구뻐지면 먹는 것이다. 조금 더 합리적인 길은 그때 조각 피자를 하나만 먹는 것이다. 그보다 조금 더 합리적인 길은 오이나 견과류 등을 조금 먹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길은, 구뻐지기 전에 잠들거나 구쁘더라도 참고 잠드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따지면 그 시간에 야식을 먹는 버릇을 없애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이득이니까.

이 일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일도 마찬가지다. 생각과 감정이 있는 생물이라면 '되고 싶은 모습''되기 싫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되기 싫은 모습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되고 싶은 모습과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되고 싶은 모습과 되기 싫은 모습은 보통 1차원 선 위에서 상반되는 요소일 때가 대부분이라 한쪽에서 멀어지면 다른 쪽에 가까워지는 구조를 가진다. 허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모습은 1차원 선이 아닌 2차원 면 위에 존재해서, 한쪽에서 멀어져도 다른 쪽에 가까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가로축뿐인 선과 달리 면에는 세로축도 존재하니까. 삼각형의 왼쪽 아래 꼭짓점에서 멀어진다고 반드시 오른쪽 아래 꼭짓점으로 이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위쪽 꼭짓점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정삼각형이라면, 왼쪽 아래 꼭짓점에서 오른쪽 꼭짓점도, 위쪽 꼭짓점도 둘 다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으니까.


뜻이 이어져서 잠시 다른 말을 하자면, 정치 성향도 이것과 똑같다. <‘보수화’된 2030세대>라는 말은 누군가 그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프레임일 뿐이다. <보수화된 젊은 세대>는 ‘그랬으면 좋겠다’지, ‘실제 그렇다’가 아니다. 물론 2030세대에도 보수가 있지만 그들은 원래 그쪽이었고, 최소한 요 몇 년 여론조사나 투표로 새로 드러난 이들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단지 '반진보화'된 것이다.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반진보화’된 2030세대>이다. 정치성향이 단순히 1차원 선이라면 '반진보화'와 '보수화'는 같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 성향은 1차원 선이 아닌 2차원 면이다. 그러니 그들이 진보 진영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보수화된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 그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으니까, 그래서 정치 성향 구도에 대해 아직 분명한 정립이 안 된 그들 귓가에 속삭이며 세뇌하는 것이다. ‘정치 성향 구도는 2차원 삼각형이 아닌 1차원 선이야. 그러니 너희가 진보 측 정책에 반대할수록 너희는 보수에 가까워지는 거야’라고. 그렇게 몇 년 전부터 진영 중간에 끼인 세력을 흡수하고, 이후 진보 진영에서 더 밀려나올 이들을 부드럽게 흡수하기 위한 작당일 뿐이다. 실제 그들은 진보 진영에서 멀어졌을 뿐, 아직 보수는 아니다. 정확히는 보수일지 중도일지 정해지지 않았다. 중도여도 ‘양두구육’ 같은 썩은 중도일지, ‘시끄러 임마’ 같은 기회주의뿐인 중도일지, 아니면 정말 스스로의 기준이 분명하고 상식적이며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받고 싶지 않은 만큼 부당한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은 건강한 중도일지, 그것은 스스로 정하기 전까지는 남이 규정할 수 없다. 그런 건강한 중도라면 평생 극우들에게 '좌빨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나도 그들을 인정한다. 요즘 그들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평생 속해있던 진보 진영에서도 '극우 유튜버와 동급'라는 모멸적인 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건강한 중도라면 지지한다.

이렇듯 정치 성향은 선이 아니라 면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반진보화된 2030세대>가 있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현재 만 서른아홉인, 진보든 보수든 중도든 2030세대에 속해 있는 가장 연장자로서, 나보다 어린 그대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다. 지난 몇 년 간 진보 진영의 정책 중 몇 개를 반대하기에 잠시 '반진보화'된 것뿐이다. 단지 표가 필요하니 어느 ‘나쁘게 똑똑한 인간’이 <보수화된 2030남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여러분들을 가두고 써먹을 뿐이다. 물론 상대 진영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말을 어떤 경계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진보 진영 쪽도 그 프레임이 견고해지도록 한몫 거들고 있어서 답답하고.


말이 잠시 샜지만 어쨌든 되고 싶은 모습과 되기 싫은 모습은 1차원 선 위에도, 2차원 면 위에도 존재한다. 심지어 그보다 높은 차원에도 속해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한쪽에서 멀어지는 것만으로 반대쪽과 가까워질 수 있지만, 어떤 것들은 단지 한쪽에서 멀어지는 일이 다른 쪽에 가까워지는 보장이 될 수 없다. 되기 싫은 모습에서 멀어지려는 노력과 더불어 되고 싶은 모습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함께 필요하기도 하다. 바람과 욕망은 보통 이렇다. 보다 수준 높고 복잡하고 이상적인 모습일수록 1차원의 단순함보다 2차원의 모습을, 2차원의 모습뿐만 아니라 3차원적인 노력도, 3차원적인 노력에 4차원인 시간까지 필요해진다. 그래서 간혹 또는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 한 사람 안에 1차원에서 4차원까지 여러 계층의 욕망과 이상이 모두 존재하고, 그것을 한 사람이 동시에 접수하여 처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고작 1차원적인 욕망에 3차원적인 노력이 과하여 부여되기도 하고, 4차원적인 이상임에도 2차원적인 방식만 시도하기도 한다. 사람이 가진 강약점과 장담점에 의해 누군가는 설령 어떤 3차원 복잡적인 욕망을 잘 다룬다 해도 어떤 1차원 단말적인 버릇에는 휘둘릴 수도 있다. 반대로 누군가는 2차원 간단한 이상을 구현하기 어려워해도 다른 4차원 다면화하는 욕망에는 초연하기도 하다. 이렇듯 사람은 다양한 계층의 욕망과 바람을 각자의 능력대로 처리하며 보다 ‘되고 싶은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산다.

허나 간혹 사람은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지 못할 때가 생긴다.

다시 말해, ‘이런 모습이 되고 싶어’라는 이상적인 내 모습, 혹은 ‘오늘 나 이런 거 되게 잘했어’라는 최고점이 터진 일시적인 내 모습, 이것을 ‘평상시 늘 유지할 수 있는 내 모습’으로 착각한다는 뜻이다. 즉, ‘고점의 평시화’다. 추후 <바라는 것을 등으로 말하라>에서도 다시 언급되겠지만, 이 고점의 평시화가 강한 사람일수록 삶의 고락은 평탄하지 못하다. 평탄하지 못한 까닭은 특정 외부 자극이 강하고 잦아서만이 아니다. 기대치와 만족도가 너무 높아 스스로가 별일 없는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새벽에 배가 고플 수도 있다. 위장이 찼지만 단지 속이나 입이 구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야식을 먹을 때도 있다. 그래서 거북한 속 때문에 잠을 조금 설칠 수도 있고, 다음날 아침 더부룩한 속을 문지르며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너무 잦지만 않으면. 나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실수 없이 사는 사람도 아니니. 충동과 욕망에 자주 지기도 하고, 종종 바보 같은 짓도 하고는 스스로 깔깔 비웃을 때도 있다. 이러쿵저러쿵 잘하기도 못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주 조금씩이라도 ‘되고 싶은 모습’에 다가가는 삶. 지금은 그것이면 된다. 다만 자신이 그런 수준이고 그런 사람임을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잘한 일은 몇 번이고 스스로 칭찬하지만 못한 일은 눈을 돌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진 강점이 발휘된 일에는 으스대면서 자랑하고 싶어하지만 약점이 드러난 일은 핑계를 대고 합리화하며 무마하려 한다.

그래서 오늘 새벽 한 시에 조각 피자 두 개를 먹었던 이 일은 내게는 스스로 조롱할 만한 일이다. 단지 충동에 져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럴 수 있다. 잦지 않으면 그래도 괜찮다. 그러니 충동이 아니라, 포장의 문제다. 단순히 충동에 졌을 뿐이면서, 그것이 마치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처럼 포장하는 일. 마치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나 원래 항상 고점으로만 사는 사람인데~ 실수하는 사람 아닌데~ 알고 보면 이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인데~’라며 지나가던 개미가 들어도 비웃을 핑계를 대는 일. 그리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 핑계와 합리화가 타인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오밤중에 누가 본다고. 나는 왜 나를 속여야 하지.

다만 이 조롱이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이 과정에 대한 정립을 미리 끝내 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인 ‘로버트 킨케이드’에게 감사를 보낸다. 2013년 어느 여름, 신천의 <작은 우체국>이라는 이름의 카페 2층에서, 삶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읽으며 그간 정리되지 않고 가지고만 있던 생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사상으로 정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좀 그래. 실수할 때마다 매번 과하게 자책하고 스스로를 질책하면 발전하기도 어렵고 나아갈 수도 없어. 내가 이 과정에 대해 명확한 정립을 해놨다면, 가끔 이렇게 포장이든 헛된 합리화든 할 때마다 가볍게 껄껄대며 스스로를 비웃어줘. 이 바보 같은 놈!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야.’ 그의 말을 듣고 사상을 정립한 이후로는,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나 역시 낄낄 대며 웃게 됐다. ‘멍청아! 뭐하냐?’ 하면서. 일기장에 적은 저 <첫 한 줄>처럼, 나도 모르게 핑계를 대거나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보이면 ‘이놈!’ 하고 고함을 친다. 괜찮다. 나는 강점과 장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늘 ‘고점의 평시화’ 상태로는 살 수 없다. 약점과 단점이 싫어서 그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꿈꾼다면, 그 방향으로 가는 첫 걸음은 ‘내가 방금 이딴 짓을 했다!’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일이다. 괜히 강점과 장점만 자꾸 강조하는 합리화도, 하물며 약점과 단점을 길섶 수풀 너머로 슬그머니 던져놓는 핑계도, 최소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아닐 것이다.




[한 줄 요약]

자기 전에 못 참고 조각 피자를 먹었다. 그것도 두 개나. 멍청이. ㅋㅋ






2025. 04. 11. 15:15






요즘 길이 점점 길어지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말을 다루는 이의 의무